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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연칼럼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 환경 문화 운동

진리를 찾아서 <생각하는 문화공간> 200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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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32회 작성일 23-01-0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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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을 가는 것은 진리이다. 나는 이 진리를 한 번도 거역한 적이 거의 없다. 거역 못하는 것은 남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남처럼 진리라고까지는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남들은 나만큼 힘들게 얻어지지 않는다. 쉽게 얻어진데 대해서는 참된 의미를 갖다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렵게 얻어진 데서는 성취감을 느낀다. 백에서부터 천을 쌓아 올린것과 아무것도 없는 영에서 천을 쌓아올린 것에 대한 노력을 생각해 보라. 

 너무 쉽게 얻어진 것에는 무력감이 뒤따르고 금방 잊혀지지만 어렵게 얻어진데서는 그 의미를 자꾸 더해간다. 다시 말하면 어렵게 얻어진 곳에서는 진리를 탐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화장실을 가면서 진리를 찾아 헤맨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화장실이라는 곳은 어디를 가도 남겨가 나란히 손을 맞잡고 한데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들어갈 때는 같은 통로로 들어가서 남겨가 각각 헤어지는 게 나는 솔직히 못마땅했다. 그것 또한 착각을 불러서 걸핏하면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쫓겨났다. 

 제대로 남자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면 정말 진리가 다른 게 없었다. 바로 그게 진리였다. 그보다 더한 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말 못하는 고통에서 헤어났다는 것, 그 개운한 느낌이야말로 허식 없는 진리였다. 

 식당과 화장실,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저울 위에 식당과 화장실을 얹어 놓고 달 수만 있다면 한 번 달아보고 싶다. 하기야 내 자신도 화장실의 중요도는 뒤로 미루면서 불결한 생각부터 하는 타성에 젖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먹어야 산다. 먹지 않고 사는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발 밑에 짓밟히는 이름 모르는 풀 한 포기도 뿌리로 자양분을 빨아들인다. 하물며 사람이 식음을 거역할 수 없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막중한 책임이었다. 그러고 보면 먹기 위해서는 식당이 더 중요한 것 같으나 먹고 놓고 생각을 하면 어느 쪽도 기울 수 없는데 일반적인 견해는 화장실이라면 불결하다는 생각부터 한다. 

 뒷간이라는 아주 어두운 그늘을 거쳐오면서 그 더럽고 누추한 통나무 다리를 걸터 앉았던 부끄러움이, 그 누구도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지난시절이 있었으므로 아직도 화장실에 대해서는 소외감을 가진다. 솔직히 나도 지난날의 그러한 체험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우리 인체를 곰곰이 따져보면 중심이 바로 거기였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엎드리나, 걸음을 걸으나, 심지어는 물구나무를 서도 중심은 변함없이 바로 거기였다. 어느 쪽 어느 방향으로 자세를 바꾸어도 항문은 몸의 가장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체위의 가장 중심이면서 그 주위가 불행하게도 깊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끄럽게 여기면서 한결같이 속옷으로 감싸고서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엄속한 예의를 지킨다. 결코 그것이 수치스러움은 아니고 중심에 대한 예우다 라고 종전에 사고방식을 바꾸었다. 

 모든 이치는 중심을 두고서 전체를 지탱하는 구심력에 묶인다. 그러고 보니 치 핵의 아픔도 앉으나 서나 누우나 엎드리나 걸으나 변함없이 내 신체의 중심력을 파고 들어서 전심을 마구 흔들어 댔다. 

 중심을 잃으면 한 쪽으로 기울어 진다. 기울어져서 무너지는데 무슨 장사가 있겠는가. 비로서 나는 우리 몸에도 중심이 절대적임을 깨달았다. 정말 그렇다. 화장실 없는 생활은 있을 수 없다. 그건 결코 익살이 될 수 없다. 인체의 중심이 항문인 듯이 화장실이야말로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어 마땅하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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