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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화장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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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60회 작성일 17-01-19 23:00

본문

일본편

-일본화장실의 역사 

고대 일본에서는 화장실을 '가와야'라고 불렀다. 가와야는 한자로 [川屋] 또는 [厠屋]로 표기(表記)한다. [川屋]는 하천 위에 변소를 만들어 분뇨를 그대로 강물 위에 흘러 버린 고대 일본의 관습에서 유래된 말이며, [厠屋]는 그보다 훨씬 후에 사용된 명칭으로, 사람이 사는 가옥과 떨어져 있는 구석진 곳에 변소를 짓고 사용했던 관습에서 나온 명칭이다. 따라서 후자의 명칭은 농경 사회가 정착된 후에 분뇨를 비료(肥料)로 사용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대 일본 사람들이 하천 위에 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서 방분, 방뇨했던 사실이 최근 일본의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일본 지바 현(千葉縣)의 고대 취락지였던 수고우 유적에서는 붉은 점토 층 속에 일정한 폭으로 통나무를 박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 다리처럼 만든 구조물이 발굴되었다. 바로 그 근처에서 고대 헤이안(794∼1192) 시대 가옥의 유적이 있는 것과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이는 고대 도쿄 만(東京灣)으로 유입되는 하천 위에 세워진 변소였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 바닥에서는 분석(糞石)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동남아에 남아 있는 하상(河床)변소의 고대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천 위에 변소를 만든 경우와는 다르나 자연수를 이용해 분뇨를 하천에 버리는 '고오야산(高野山)'이라는 변소도 있었다. 고오야 산은 와가야마현에 있는 한 지명(地名)으로서 원래 불교의 중심지인데 공해(空海)라는 중의 수행 도장이었다. 공해는 산 위에 있는 어떤 우물에서 흐르는 자연수를 끌어들여 부엌과 변소에서 이용하고 이를 가까운 강으로 흐르게 하여 버리는 일종의 천연 수세식 변소와 수도 시설을 설치, 이용하였다. 이러한 연유(緣由)로 일본에서는 화장실을 '고오야산'이라고도 한다.

-변소의명칭

일본에서는 변소를 세이,곤혼,셋진,도오수,사이죠,고오가,죠오즈바,간죠,고후죠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모두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오가'는 원래 승방(僧房) 뒷편에 있는 세면장을 뜻하는 것이지만 대개 세면장 옆에 변소가 있었기 때문에 변소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또한 '죠오즈바(手水場)'란 말도 용변을 보고 난 후 손을 씻는 장소를 일컫는 데서 나온 말이다. 고오가와 죠오즈바라는 말은 모두 에도(江戶,1603∼1867)시대부터 불리게 되었다.

일본에서 변소란 말이 사용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다. 물론 변소라는 말의 원래 뜻은 '변을 보는 장소'라는 것이지만 한자의 [便]은 '침착해진다' 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영어의 레스트 룸(rest room)과는 통하는 바가 있다. 어떤 사람은 편리한 장소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변소를 뜻하는 일본어 '도이레'를 사용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서 영어의 토일렛(toilet)이라는 단어의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나라(奈良,710∼794)시대나 헤이안(平安,794∼1192)시대까지만 해도 수도(首都)나 도시라고 해봐야 농촌과 별 차이 없이 공지(空地)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변소를 이용하는 일 없이 집 주위에서 방분, 방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명국이었던 중국, 한국과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들 나라의 풍습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이때 중국의 호자(虎子),한국의 요강(尿岡)등이 들어와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헤이안 시대 일부 귀족들이 집안 한구석에 병풍(屛風)이나 발을 쳐 그 안에 칙상이라는 뚜껑이 달린 변기를 두고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칙상 안에 모래나 재를 담아 용변이 끝난 후에 그 내용물을 뜰 구석에 묻었다. 이는 중국의 의자식 변기와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다. 어떤 것은 칙상 뒤에 높은[T]형으 배판(背板)이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귀족들이 정장을 한 채로 변을 볼 경우, 웃옷의 뒷부분을 배판에 걸치게 해서 속옷만 내린 채 용변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분소로와 노방변소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노상에서 방뇨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노상에서 방뇨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자기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교토(京都)에는 '분소로(糞小路)'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거리가 바로 공중 화장실처럼 누구나 가서 대. 소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거리에는 언제나 오줌, 똥이 쌓여 있어서 누구든 이 거리로 들어갈 때에는 신고 갔던 신발을 벗고 입구에 놓여 있는 굽 높은 나막신으로 바꾸어 신고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후 천황(天皇)이 우연히 이 거리를 지나다 그 내력을 듣고 거리 이름을 바꾸도록 지시해서 오늘날의 금소로(錦小路)가 되었다.

메이지(明治)3년(1870) 일본 정부는 '방뇨 취제의 포고'를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요코하마 시내에는 83개소의 노방(路傍)변소가 만들어졌다. 이 노방변소는 일본 최초의 공중변소였는데 큰 변조를 땅에 묻고 그 주위를 판자로 막은 어설픈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고하고 노상방뇨의 풍습은 쉽게 근절(根絶)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방변소의 개량은 계속되었고 명칭도 노방변소에서 공동변소 또는 공공 변소로 개칭되었다.

-서서 오줌 누는 일본 여성

에도(江戶,1596∼1686)시대 일본 교토(京都)의 여자들은 길가의 소변통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예사롭게 소변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메이지 시대 말기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염집 아가씨. 하인을 거느린 상류층 부인들 누구 하난 가릴 것 없이 도로변 벽을 향해 엉덩이를 내놓고 선 채로 오줌을 누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두고 비웃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의 여인들이 선 채로 오줌을 누는 풍습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나 작업 바지인 몸빼를 입었을 때에도 오히려 서서 일을 보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모노차림을 했을 때에는 윗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다리를 벌린 다음 무릎을 구부리고 옷자락을 옆으로 걷으면 되고 몸빼를 입었을 경우에는 윗몸을 크게 구부리고 다리를 벌린 다음 옷을 밑으로 내리고 일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서 오줌 누는 습관은 팬티를 입지 않았던 시대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의 여성들도 팬티를 입게 되었고 서서 오줌 누는 습관은 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여성들의 경우일 뿐이다. 태국 북부 라후라 지방에 사는 여성들은 지금도 선 채로 오줌을 눈다.

-분뇨저장소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농업이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가마구라(1185∼1333)시대에 와서 부터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 해에 벼와 보리를 두 번 수확하는 소위 이모작(二毛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지력감소 속도를 더욱 촉진시켰고 토지에 뿌리는 비료도 일모작 때보다 배 이상이 더 필요한 게 되었다. 이는 지력감소 속도를 더욱 촉진시켰고 토지에 뿌리는 비료도 종래 일모작 때보다 배 이상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산과 들의 풀이나 나뭇잎, 소나 말의 똥을 비료로 사용해 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의 분뇨까지 비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본의 헤이안(平安,782∼1185)시대 말기와 가마구라 시대는 중국의 송(宋)시대로 이때 중국 남방지대의 농업 기술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법이 함께 전해졌다. 당시 중국에서는 농가 주변에 분뇨를 저장하는 저장소를 만들고 그곳에 지붕을 씌워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였다. 이 저장소는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주위를 벽돌로 쌓은 웅덩이의 형태였는데 이곳에 저장된 분뇨는 일정기간 발효된 후에 논밭에 뿌려졌다.

송나라의 이러한 분뇨 시분법을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길거리나 들판에 방분. 방뇨하던 습관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농가마다 변소를 만들게 되었다. 이후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는 인근 농민들이 직접 분뇨를 수거하게 되었고 이는 도시 위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퇴비와 분뇨의 매매

대륙으로부터 수도재배가 전해지면서 본격적이 벼농사가 시작되자 일본에서도 분뇨를 퇴비로 사용하는(農法)사용되게 되었다. 이때부터 땅에 용기를 묻고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위에 지붕을 씌운 변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에는 길쭉한 두 개의 판자 대신에 장방형의 구멍이 뚫린 판자를 깔거나 도기나 목재 변기를 만들어 그 위에 설치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일본에 기독교 선교사로 건너간 켄벨의 여행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일본에서는 주민들이 분뇨같이 불결한 것들을 모아 농사에 이용하기 때문에 도로의 청결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마차를 쫓아다니면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말똥을 모아 밭에 가져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여행자의 분뇨까지도 모아가며 농민들은 농가 근처 길가에 조그만 변소를 짓고 그 안에 분뇨를 저장하여 나중에 밭에 뿌린다. 낡아서 버린 짚신도 모아 태워서 재를 만들고 분뇨에 섞어 비료로 사용한다.

포루투갈에서 온 선교사 루이스(1532-1597)도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유럽에는 마분(馬糞)을 채소밭에 비료로 주지만 인분(人糞)은 버린다. 우리는 분뇨를 운반해서 버려주는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쌀이나 돈을 받고 판다.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지 않는 서양인에게 일본 농민들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분뇨 취급 규칙

일본에서는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게 된 이후에 각 가정이나 공공 변소에 저류된 분뇨를 농가에 돈을 받고 팔거나 농산물과 교환하는 관습이 생겼다. 처음에는 농민들이 직접 수거해 갔지만 후에는 도시의 분뇨를 수거해 농가에 팔아 넘기는 전문 분뇨 수거업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도시인들로부터 분뇨를 싼 값에 사서 농민들에게 비싸게 팔았고 또한 다른 업자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방해까지 하여 독점 사업으로의 폐단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메이지(明治)3년에 이르러 일본 정부는 분뇨 수거업자들의 담합(談合)을 폐지하는 조치까지 내리게 되었으며, 메이지 11년 (1878)에는 처음으로 '분뇨 취급 규칙'을 제정, 시행하였다. 농민들이나 분뇨 수거업자들이 사들이는 분뇨의 가격도 그 질에 따라 다음과 같이 차등 적용되었다.

최상등품 : 다이묘(大名)가 사는 집의 변
상 등 품 : 시중 공공 변소의 변
중 등 품 : 보통 가정의 변
하 등 품 : 소변이 많은 변
최하등품 : 감옥,유치장의 변

이 등급은 분뇨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음식물의 내용을 기준으로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분뇨가 생산된 장소에 따라서도 분뇨 가격에 차등을 두었는데 보통 가정의 변(중등품)의 경우에도 서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분뇨 값에 비해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분뇨 값이 상대적으로 비쌌다.

-수거식 변소와 분뇨처리

분뇨가 매매되던 시대에는 수거식 변소가 일반적이었다. 이 수거식 변소에는 변소 밑에 분뇨를 저류하는 장소가 있었고 뒤에 밖으로 퍼내기 위한 구멍이 있었다. 분뇨가 다 차게 되면 사람들은 긴 자루에 바가지 같은 것을 매달아 그것으로 분뇨를 퍼내 운반통에 담았다. 분뇨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분뇨통이 양쪽 끝에 달린 긴 막대를 어깨에 매고 출렁출렁 하는 분뇨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골목을 나와 길가에 세워둔 우마차나 손수레에 싣고 다녔다. 분뇨 수거업자의 수거차가 운하나 강변에 도착하면 분뇨를 운반하는 배가 줄을 잇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배들은 선체 가운데 부분이 분조로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풍경은 메이지, 다이쇼오 시대를 거켜 쇼오와의 시대까지 볼 수 있었으며 지금의 시부야나 신주꾸의 번화가에도 냄새를 풍기면서 분뇨를 실은 우마차가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수거된 분뇨들은 오차노미즈옆 밑의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분뇨선을 이용해 농촌으로 운반되었다.

-갈서선

메이지 시대 이전의 옛날 에도 성에서는 분뇨를 바다에 길어다 버렸다. 그 일에 대한 책임자를 '갈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오물배 역시 갈서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요즘에도 현대판 갈서선이 있어 동경의 분뇨를 바다에 처리하고 있는데 분뇨가 떠오르거나 조수를 따라 밀려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하여 분뇨에 철을 섞어 무겁게 만든 다음 바다 깊이 가라 앉히는 방법을 쓴다.

분뇨의 폐기 지점은 동경에서 3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것인데 이렇게 바다에 분뇨를 폐기하는 밥이 동경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가와사키, 요코하마 등 일본의 여러 곳에서 현대판 갈서선이 활약중이다. 일본인들은 이들 배를 일명 ‘황금함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황금함대의 배들 중에는 처리장고에 닿기도 전에 그냥 버리는 배들이 있어서 항상 감시선이 뒤따른다고 한다.

1943년 동경의 분뇨 처리 종사자 수는 3,600명, 트럭이 380대, 선박이 536척, 손수레가 12,220대, 우마차 수가 36대였으며 분뇨 운반통이 112,680개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분뇨 운반통 중에는 특별히 소등에 실을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있었다.

당시 일본의 농가에는 외변소라는 것이 있었다. 외변소는 가옥의 본체와는 좀 떨어진 곳에 지었는데 그 이유는 비료로 이용되는 귀중한 분뇨를 저류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악취나 전염병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좀 경제적 여유가 생긴 후에는 내변소도 지었다. 내변소는 집 안의 구석을 막아 변소로 만든 것인데 여기서 발생한 배설물은 집 밖의 저류조에 모았다가 수거하는 형식으로 이용되었다.

이 내변소는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졌다가 그 후 도자기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어 사치스럽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변소의 역사를 볼 때 외변소가 먼저 출현하였고, 내변소는 그 후에 생긴 것이다. 농가의 외변소는 안채와는 별도로 크게 짓고 그 안에 각종 농기구와 시비용 도구 및 뷴뇨 운반통 등을 쌓아 두기도 했다.

외변서 이외에도 농촌의 밭 귀퉁이에는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데 편리성을 더하기 위해 일시적인 저류소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큰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사용하였으나 나중에는 콘트리트로 대체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이 밤에 집으로 가다가 이곳에 빠지는 일도 간간이 일어났는데 이 저류소는 대부분 비수기에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장소로서 크기는 일가족의 분뇨 배출량의 1개월 내지 3개월 분 정도를 저장할 수 있는 규모였다. 2001-07-18 14: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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