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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 환경 문화 운동

중국 - 화장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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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08회 작성일 17-01-1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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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편 

-중국의 화장실 역사

주요 문화 발상지 중 하나인 중국에서 화장실 문화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살펴 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화장실 문화에 대해 알려주는 유물들은 대부분 소실(消失)되어 남아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아 있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한(漢)나라 시대의 소변 항아리를 들 수 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이 소변 항아리를 호자(虎子)라 칭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 중국에는 린(麟)이라는 상상의 동물이 있었다. 겉모양은 실재(實在)하는 기린과 흡사하지만 사람들은 이 상상 속의 동물을 짐승의 왕으로 추앙(推仰)했다. 그들은 기린이 나타나는 것을 성인(聖人)이 탄생할 징조라고 믿었고 이 성(聖)스러운 짐승은 호랑이가 엎드려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면 그 속에 오줌을 누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영향으로 소변기는 호랑이 의 머리 모양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호자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변기

주나라(周, BC 1027∼771) 시대에는 위유(威宥)라 칭한 변기가 있었다. 위(威)는 호자와 같은 변기를 뜻하는 자이고, 유(宥)는 구멍을 팠다는 의미로서 구멍이 파진 모양의 변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漢, BC 202∼AD 8)의 무제(武帝)는 옥으로 된 변기를 사용했으며 일이 끝나면 시종(侍從)이 뒷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무제는 자신의 변기를 두는 곳을 헌중(軒中)이라 하였다. 이때 헌(軒)은 나중의 칙(厠)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제 때 흉노(匈奴)의 사신(使臣)이 와서 고하기를 "흉노가 민(民)을 쳐서 왕의 머리를 음기(飮器)로 사용했다."고 했다. 이 음기를 두고 술잔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호자 즉, 소변기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마시는 것이면 주배(酒盃)나 기타 다른 말로 표기했을 터이니 소변기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결국 사신의 말은 적국 왕의 해골을 요강으로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또한 규방(閨房)마다 변기를 두고 이 그릇을 청유(淸鍮)라고 불렀다. 삼국 위나라(魏, BC 220∼265) 시대에는 나무를 파서 변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현대 중국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변기인 마통(馬桶)의 시초가 되었다. 이 변기는 낮에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보관되었다가 밤에는 침상 옆에서 사용되었다. 진(晉)나라, 당(唐)나라 시대의 궁정과 귀족 부호들은 일상 생활이 화려해서 변기도 모두 칠보(七寶)로 장식했다.

-궁중의 변기

북경의 만수산(萬壽山)에는 청조(淸朝)의 궁전이 있다. 이 궁전에 변소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紛紛)하다. 다만 이후 잘 발달된 중국의 변기 문화로 미루어 봐서 이때 변기가 사용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중국 왕실에서 사용된 변기는 의자식으로 된 것으로 그 밑에 호자가 놓여 있다. 이는 유럽의 초기에 있었던 의자식 변기와 매우 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다르기는 해도 대체로 표주박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상자에 앉게 되어 있었고 그 상자 속에 금속제의 분(盆)이 들어 있었다. 이 분은 은(銀)이나 동(銅)으로 만든 것으로 용무가 끝나면 종들이 뚜껑을 덮어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야외에서 갑자기 용변을 보게 될 경우에는 환관(宦官)이 황색의 유포제(油布製) 텐트를 사각으로 설치했다. 그러면 여관이나 마마가 그 안에 들어가 손 씻는 물을 바치기도 하고 장방형으로 자른 종이를 부드럽게 비벼 뒤를 닦아주기도 하며 여러 가지 시중을 들었다. 용견이 끝난 후에는 양 끝에 아름답게 수를 놓은 손 닦는 수건을 여관이 바쳤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 양자의 해골변기

조나라의 양자(襄子)는 현명한 군주였지만 한번 화가 나면 그 기세를 막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한번은 양자가 지백(智伯)에게 공격을 당해 성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양자는 굴하지 않고 갖은 지략과 용맹으로 오히려 지백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이긴 양자는 지백을 죽이고 해골의 살을 발라내어 요강으로 썼다.

지백을 섬기고 있던 예양이라는 자가 이 참담한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섬기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남자는 자신이 섬기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나는 지백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가!"

결국 예양은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자객이 되어 양자의 성에 잠입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장소가 화장실이었다. 그는 화장실에 몰래 잠입하여 양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양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그는 양자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예양은 굴욕과 참담함에 빠져 양자 앞에 끌려 나왔다. 그러자 양자는 뜻밖에 예양을 그냥 살려주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주군의 복수를 하려 했다니, 정말 충직한 신하로구나!"
예양은 양자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수치심과 모멸감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예양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변기를 옥좌로

'변기에 앉아 정무(政務)를 보는 왕'이라는 말은 비단 프랑스의 루이 14세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동양에서도 그런 특별한 취미를 가진 군주가 몇몇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세기경 연나라의 왕 한광(韓)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한광은 평소 아끼던 목제 변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이 변기를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한번 앉았다 하면 여간해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배가 고파도 일어서지 않고 변기 위에 앉아 식사를 했으며, 변기 위에서 음악을 듣고 독서를 즐겼다. 변기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변기를 옥좌(玉座)로 삼았던 것이다.

기원전 1세기경 한나라의 무제 역시 변기에 앉은 채로 대신이나 장군을 알현(謁見)했던 왕 중의 하나이다. 물론 변기위에 앉아 정무를 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있어 그리 유쾌한 일이 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악취를 풍기는 것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발가벗은 왕의 모습(당시 중국 귀족들은 탈의하고 용변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을 보는 것은 아주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며느리의 효성

변기에 얽힌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강남 상주(常州)의 한 마을에 노파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며느리가 쌀로 밥을 짓다가 옆 집 색시가 불러서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밥이 다 되었다. 노파는 며느리를 불렀지만 며느리는 집밖으로 나가 버렸는지 대답이 없었다. 노파는 밥을 그릇에 퍼 담았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며느리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어머니가 밥을 담아놓은 그릇은 밥그릇이 아니라 변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는 아무 말 없이 가운데 깨끗한 밥을 다른 그릇에 담아 시어머니께 드리고 자신은 변기에 붙어 있던 밥을 먹었다. 가난한 살림에 쌀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대문 밖에서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며느리가 밖에 나가 살펴보니 집 앞 나뭇가지에 천으로 된 망태가 매달려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보니 그 속에 쌀이 두서너 되 가량 들어있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기뻐하며 그 쌀로 시어머니께 밥을 지어 드렸다.

나중에 다시 망태를 들여다본 며느리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망태 안의 쌀이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망태는 퍼내도 계속 차는 신기한 망태였다. 며느리의 효성에 감복한 하늘이 은혜를 내린 것이다.

-민가의 변기

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변기 문화 중에서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역시 마통(馬桶)을 꼽을 수 있다.

호자(虎子)가 소변기라면 마통은 대소변 겸용의 실내 변기라고 할 수 있다. 마통은 높이 약 40센티미터 정도의 나무로 된 일종의 항아리로서 마치 자그마한 생맥주 통처럼 생겼는데 대개 옻칠을 해소 붉은 색을 냈고 허리춤에 구리로 띠를 둘렀다.

뚜껑은 몸통과 같이 옻칠을 한 것도 있지만 때때로 금색의 장식이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마(馬)라는 글자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말 잔등에 탄 것처럼 앉아서 용무를 보게 되어 있다. 마통은 마자(馬子), 정통(淨桶), 변통(便痛), 마통아(馬桶兒)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된 어린이용 마통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지금도 중국의 시골을 여행하다 보면 아침 일찍 주부들이 마통을 가까운 개울가로 가지고 가서 씻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 아낙네들은 대나무를 잘게 잘라 만든 솔로 그 속을 씻어낸다. 그러나 도시의 경우에는 매일 아침 종을 흔들면 마통을 비워 주는 사람이 있어서 돈을 받고 처리해 준다.

중국에서는 처녀가 시집을 갈 때 중요한 혼수(婚需)로 반드시 마통을 챙겨서 가지고 간다. 그 속에 빨란 칠을 한 삶은 계란을 넣어가는 풍습이 있는데 시집 식구나 시집간 마을의 처녀들 중에서 이 계란을 먼저 얻은 처녀가 일찍 시집을 가게되고 아들을 낳게 된다는 미신(迷信)이 있기 때문이다.

-돼지변소

중국 고대의 변소를 가리키는 한자로서 청,혼 또는 설은(雪隱)이라는 말이 있다. [청]은 물이란 뜻으로 고대에 수세식 변소가 있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없다. [혼]은 돼지가 우리에 갇혀 있는 글자의 모양처럼 돼지 변소를 뜻한다.

이 변소는 보통 집 뜰의 한 구석에 지붕을 이은 우리를 만들고 그 속의 흙을 1미터 내지 1.5미터정도 파내 그 속에 돼지를 기른다. 돼지 우리와 인접한 한쪽 구석에는 변소가 있어서 대소변이 비스듬히 돼지 우리 속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따라서 돼지는 인분을 먹고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은 돼지 변소는 오늘날까지 중국 시골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이것은 고대에 인분(人糞)을 가축을 이용해 처리하던 방법 중 한 가지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변소에 가까이 가면 돼지는 소리를 지르며 다가온다. 만약 용변이 늦으면 코로 사람의 엉덩이를 문지르는 일도 있다고 한다. 돼지는 따뜻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분은 즐겨 먹지만 식어지고 굳어진 것은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의 돼지 변소는 이미 전한(前漢)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양(洛陽)에서 지하에 돼지 변소의 축소형 토기(土器)와 돼지 변소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돼지 변소를 고안해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모두 아는 것처럼 옛날 사람들은 항상 맹수(猛獸)의 위협 속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독사(毒蛇)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사람들은 독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지(奇智)를 발휘했다.

사람들은 우선 집을 높게 지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돼지를 키웠다. 뱀이 돼지에게 꼼짝 하지 못하는 천적(天敵)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이용한 것이다.

돼지 변소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도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한(漢)나라의 유방이 황제로 있었을 때였다. 유방의 황후였던 여태후는 유방의 애첩인 척 부인을 시기(猜忌)하여 잡아 두 눈을 빼고 양 귀와 팔 다리를 잘라 돼지 변소에 가두고 인분을 먹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돼지 변소에 갇힌 척 부인을 두고 '잘 자란 인돈(人豚)'이라고 불렀다. 사랑을 빼앗긴 여자의 미움과 한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인지 소름이 끼치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돼지 변소는 필리핀 등 동남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일본의 오키나와와 한국의 제주도에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수도장으로 사용된 변소

중국 고대에 변소를 가리키는 말 중에 '설은(雪隱)'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말은 전술(前述)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사서정(東司西淨), 등사(登司)란 말 등이 있다. 이는 고대 중국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스님들이 그들 승방(僧房)의 동쪽에 있는 변소를 동사(東司), 서쪽에 있는 변소를 서정(西淨), 남쪽에 있는 것을 등사(登司), 북쪽에 있는 설은(雪隱)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중국의 절강성 양파부의 서북에 지금도 설보사(雪普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진(晋)대에 창건되어 송(宋)대에는 설보산 자성사(資聖寺)라 불렸던 매우 크고 유명한 절이다. 명승들이 많이 났으며 송(宋)의 순화(淳和) 연간에는 '응몽명산(應夢名山)'이란 네 자의 칙액(勅額)을 하사받았다.

설보사가 배출한 명승(名僧) 가운데 설보명각선사(雪寶明覺禪師)라는 승(僧)이 있다. 설보명각선사가 젊었던 시절 절강성의 임안부에 있는 설은사(雪隱寺)에서 수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련승들이 맡아야 하는 일들 중에 변소 청소가 있었다. 당연히 이 일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더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분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설보명각선사가 도맡아서 했다.

그것을 두고 설보사의 중들은 설은사의 소승, 변소의 화상(和尙)이란 의미의 은어(隱語)로 변소를 '설은(雪隱)'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설은사의 변소에는 청정(淸淨)을 게을리 하지 않고 누처럼 희고 깨끗이 닦으라는 뜻의 '설은(雪隱)'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삼상사

송(宋)나라의 대문호 구양수(勾陽修)는 그가 쓴 <귀전록(歸田錄)>에서 자기가 평생 쓴 글의 대부분이 삼상(三上)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 삼상이란 말 위, 베개 위 그리고 칙간 위를 뜻한다. 이를 구양수의 삼상사(三上思)라고 한다.

-화장실전쟁

일반적으로 중일전쟁(中日戰爭)의 발단을 노구교(蘆構橋)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의 하찮은 실랑이 끝에 일어난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 신병(新兵)의 화장실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어느 날 밤 노구교 부근에서 한 일본군 부대가 야간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훈련이 끝나갈 무렵쯤 중국군 주둔지로부터 몇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일본군은 즉시 전열(戰列)을 정비하고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병사들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으며 지휘관들은 부하들의 위치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는 도중 문제가 하나 생겼다. 갓 들어온 신병 하나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일본군 지휘관은 신병이 중국군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일본군 사령관은 행방불명된 병사를 찾기 위해 중국군 주둔지에 일본군이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국은 이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중국군과 일본군이 이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동안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있을 거라고 믿어졌던 신병이 얼마 후 부대로 복귀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어이없게도 '볼일이 급해서' 잠시 변을 보고 왔다는 것.

물론 지휘관은 즉각 상부로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 사령관은 사건의 모든 전말을 은폐시키고 오히려 중국군 주둔지 내에 들어가게 해줄 것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사령관은 중국을 침략할 좋은 구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중국군 역시 일본의 이런 속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완강하게 일본군의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이것이 전쟁의 계기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중일전쟁에서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참전하였는데 전쟁 초기 일본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세계 각지에서 혁혁(赫赫)한 전과(戰果)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온갖 전염병으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장기간 주둔을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변소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전염병을 피해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주둔지는 점령 직후부터 오물구덩이가 되어버리고는 했다. 주둔지 점령 후 화장실 설치는 이후 현대전에서 필수적인 수칙이 되었다.

-반상회하는 공동변소

중국의 화장실이라면 누구나 출입문이 없는 화장실을 연상하게 된다. 북경(北京)이나 상해(上海)등 대도시 신축 호텔의 화장실은 세계 어느 화장실에 비해서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것이지만 호텔 이외의 일반적인 중국식(中國式) 화장실은 문도 없는 초라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 공공 변소에는 출입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칸막이도 없다. 설사 칸막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칸막이는 허리 정도의 높이일 뿐 이어서 쭈그리고 앉으면 옆 칸에 있는 사람의 가슴 위가 다 드러나 보인다.

일반 가정에서도 일을 보다가 옆 사람과 눈이 마주쳐야 하는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주택용 단독 화장실의 경우 역시 출입문 높이가 허리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밖에서도 누가 있는지를 훤히 볼 수 있게되어 있다. 따라서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크를 할 필요는 없다.

중국의 가옥들 중에도 따로 화장실을 두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사람들은 가족용 자택 변소보다는 마을의 공동 변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아마도 사회주의(社會主義)국가인 탓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남녀 변소의 구분은 있다.

매일 아침마다 사람들은 마을 공동변소에서 이웃과 만난다. 이 정다운 이웃사촌들은 서로 만나 집안 일이며 마을의 공동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우리 사회의 반상회 같은 분위기가 화장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변소는 일반적으로 한가운데에 통로가 있고 한쪽은 소변을 보는 곳, 그 반대쪽은 대변을 보는 곳으로 되어있다. 소변을 보는 곳에는 별다른 변기를 설치하지 않고 옆으로 길게 홈을 내어놓았다. 대변을 보는 곳에는 통로보다 한 층 높인 바닥에 변조로 통하는 폭 20센티미터 정도의 장방형(長方形)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통로와 직각으로 여러 개 만들어져 있다. 들어가서 몸을 통로 쪽으로 향하게 하고 나란히 쭈그리고 앉는 방식 한 줄의 홈이 통로와 평행으로 나 있는 방식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 구멍의 크기, 구멍의 간격이 좁게 되어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대개 칸막이가 있으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때,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는다든지 엉덩이 쪽을 마주하고 앉는다든지 남의 얼굴 앞에 자기 엉덩이를 내밀고 앉아서는 안된다.

일을 보고 있는 중에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은 채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옆의 사람과 서로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화장실은 '부끄럽고 지저분한 행위-배설을 하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정보 교환 장소인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현대적이며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 광주(廣州) 역전의 공중 화장실 역시 개별 칸막이가 앉은키 정도로 낮고 출입 공간도 매우 좁다. 서서보면 어느 칸에 사람이 들어 있는지를 훤히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어서 장화를 신은 청소원이 종일 호스의 물을 이용해 분뇨를 씻어 내린다.

대개의 사람들은 변소에 가는 것조차 남에게 알리기를 부끄러워 한다. 심지어 변소 앞에서 함께 차례를 기다리거나 용변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기조차 부끄러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용변은 누구나 해야만 하는 인간의 필수적인 행위요 결코 비밀스럽게도, 수치스럽게도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 농가의 변소는 대개 대문 옆에 흙담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구덩이를 파서 발을 올려놓을 수 있게 나무를 걸친 간단한 것으로 분뇨가 다 차면 그 위에 짚이나 낙엽 등을 덮고 퇴비로 만들어 밭에 뿌린다.

공중변소의 경우 변소의 바로 밑에 변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변소 바깥쪽에 비스듬히 콘크리트를 치고 변조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지게 해 놓는다. 변조에 분뇨가 차면 수거차가 와서 치우는데, 분뇨 수거원이 주로 여성들로 되어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중국에서는 변소를 칙소(厠所)라고 부르고 공중 변소를 공칙(公厠) 또는 공공칙소(公共側所)라 한다. 그 외에 자주 쓰이는 명칭으로 염세소(鹽洗所), 세수간(洗水間)이라는 것이 있으며 정방(井坊)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중국에서는 남녀의 변소가 반드시 구분되어 있다.

-인분 양어장과 메탄가스 변소

중국 남부에는 연못에 분뇨를 넣어 고기를 양식하는 양어장(養魚場)이 많다. 어떤 데는 연못가에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변소를 만들어 인분이 직접 연못에 떨어지게 한 곳도 있다. 그러나 양자강(陽子江) 이북으로 올라가면 이와 같은 양어장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인분 양식장 에서 자란 고기를 생식(生食)하는 것은 간흡충(肝吸蟲)의 유충에 감염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2차대전 중 중국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대부분이 이 간흡충에 감염되었다고 하니 중국 여행 중 담수어의 생식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현재 중국 농촌에서는 사람의 분뇨를 비롯해서 닭, 돼지, 소 등 사육하는 가축의 배설물을 저류, 발효해서 나온 메탄가스로 램프나 취사용 연료로 사용하는 사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설을 갖추는 데는 많은 비용이 필요할 분만 아니라 분뇨를 계속 투입해야 하는 어려움과 무엇보다도 화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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