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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화장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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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36회 작성일 17-01-19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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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화장실 역사

http://www.itoilet.co.kr/info/mun/uu.htm








300년 전쯤 프랑스의 토로와라는 곳의 시민들은 옛부터 집 안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보아 거리'라고 하는 길거리를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관청에서는 시민들에게 각자의 집에 화장실을 만들도록 종용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볼일을 보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시청 건물 앞에서 항의를 했고, 대표를 뽑아 관청의 결정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관청에서 일하시는 여러분, 우리들의 선조들은 항상 거리에서 볼일을 보았소.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손들도 전통대로 계속 이 거리에서 볼일을 보게 될 것이오" 

관청에서도 시민들의 이러한 아우성에 어쩔 수 없이 노상 화장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주민들은 '보아 거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고, 기쁨의 표시로 배변을 해서 오물이 산처럼 쌓이도록 해 놓았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도시에서는 분뇨와 쓰레기를 모두 도로에 내다 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므로, 거리가 오물로 진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든지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명이 '뒷간 거리' 혹은 '변소 거리' 이다. 

이런 실정이므로 비라도 내리면 어느 마을의 도로이건 간에 쓰레기와 진흙과 분뇨가 범벅이 되어 진창을 만들기 일쑤였다. 말의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진창이었고, 그 진창에 빠져 죽는 가축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빠져 죽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인사불성이 된 취객이 발을 헛디뎌 진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기진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였다. 파리의 포장된 큰 거리에서 도로의 중앙에는 아주 넓은 분뇨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길을 횡단하려면 이 분뇨 개천 위를 가로지른 널빤지 다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성의 경우라면 문제가 심각했다.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당시의 여성들의 머리 장식은 높이가 탑만큼이나 높았고, 치마 또한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귀족 부인들은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힘센 젊은이를 돈으로 사서 업힌 다음 건너는 일도 많았다. 이것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인들이 있었다고 하니. 직업치고는 희비가 엇갈리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풍만한 여성들을 매번 업을 수 있었으니 좋았겠지만, 오물 개천에 발을 담그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1797년 프랑스의 한 시민이 불평을 했다. 

"파리의 불결함은 너무 지독해서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번들번들하고 미끄러운 진창으로 덮힌 울퉁불퉁한 보도를 걷는데, 빨리 걸으려고 하면 미끄러지고 설령 일어나려 해도 체중을 이기지 못해 구르고 만다.」는 내용이 었다. 보도까지도 오물로 미끄러울 지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지경이 된 것일까? 1843년의 「파리시 공보」를 보면 그 이유를 쉽사리 알 수가 있다.「벌건 대낮에도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전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유럽 각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거리에서 볼일 보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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