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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역사 (세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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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49회 작성일 17-01-1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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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hihwa.net/pandora/wc/history/history.htm


화장실의 역사 [ 1 / 1 page ] 


A Prologue?

한동안 외래 관광객들에게 한국 방문에 대한 가장 나쁜 기억 중에 하나를 물으면 한결같이 "불결한 화장실"을 꼽았지만, 새 천년에 들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달라진 "화장실 문화"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많이 개선되고 있는「화장실 문화」에 대한 직업적인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사용자들은 동양식(와변기)과 서양식(좌변기) 중에서 어떤 변기를 선호할까?

찬란한 변기의 역사
지금은 일반화된 수세식 변기는 천연변기와 인공변기로 구분되며, 천연 수세식의 경우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인도의 인더스 강변 모헨조다로 유적지에서 유물이 발굴되고 로마제국에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되었다. 인공 수세식 변기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존 헤링턴 이 고안해낸 것이 최초이다. 

악취는 물러가라!
수세식 변기로 세계 최초 특허를 받은 것은 1775년 영국의 수학자 알렉산더 커밍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헤링턴을 계승했지만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악취를 고여있는 물이 차단시키는 장치'인「취판」이 부착되어 이후 도시의 상·하수도 보급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다. 

현대식 화장실의 정착 
1847년 영국 정부는 런던에 대형 하수도 시설이 완성되자 시민들에게 모든 분뇨를 하수시설에 방류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하면서 현대식 화장실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의 것과 거의 흡사한 가정용 화장실은 1852년 미국의 바논산(山) 위의 호텔화장실이 최초로 알려졌다.
한국의 경우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특급호텔, 백화점 등에 인공 수세식 변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더불어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본격화하여, 일반화된 것은 경제 개발로 GNP가 상승하던 70년대로 음식점과 유흥업소등 접객업소에 수세식 화장실의 설치를 허가 조건으로 한 것은 1977년부터 였다. 

비데 
화장실의 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루이 14세 때... 뒷물을 하는 장치도 널리 사용되었다. 
'비데' 라는 이름으로 불리 우는 이것은 원래 여성들이 섹스 전후에 국부(局部)를 세정(洗淨)하는 장치였다. 17세기의 어떤 문헌에서 '야전시 장교용 휴대 뒷물 장치' 라는 것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비데는 여성의 전유물(專有物)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서는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던 목욕보다는 샤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벽에 고정되어 있는 샤워기로는 성기(性器)나 항문(肛門) 근처를 닦을 수 없어서 남녀를 불문하고 비데를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비데의 사용은 당시의 사고(思考)치고는 퍽 위생적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많은 오해의 소지를 갖고 있었다.

배설 행위와 성 행위가 같은 기관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서인지 종종 배설(排泄)과 외설(猥褻)이 혼동되고는 하였던 것이다. 비데를 사용하던 당시의 귀부인들은 음란한 성행위를 즐기는 여자로 오해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화장실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선입관은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모습이 어때서... 
화장실 문화 개선으로 대단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있는 상당수의 사용자들이 "편리한 서양식 좌변기보다 동양식 변기 사용을 선호하고 있다" 는 소리를 듣고 의문을 갖게 된다. 대부분 위생상의 이유로, 정도가 심한 경우는 하이힐을 신고 좌변기에 올라가서 일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는데 청결한 관리와 내 집처럼 아끼는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사용자들의 선호도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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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배설 문화와 고대 변기의 유물 [ 1 / 1 page ] 

고대의 배설 문화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0만년 전의 '네안데프탈 인(Neanderthal-人)'부터 라고 본다. 4만년 전에 시작된 최후의 빙하기(氷河期)는 약1만년 전에 끝났는데 이때 현재의 인류와 거의 흡사한 '호모 사피언스(Home sapience)'가 나타났다고 한다.
유구한 과거의 원인(原人)들도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고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 것은 겨우 수 천 년밖에 안 된 과거에 불과하니 이들의 식생활과 배설에 관한 사실들을 자세히 알 길은 없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주류 기후가 좋은 하천 유역으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나일 강, 인더스 강 그리고 황화 유역 등이었다.

이들 4대 문명 발상지에서 고대의 조상들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며 산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마음대로 배설 행위를 하면서 살았다. 

고대 변기의 유물
인간의 배설 행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나 유물은 이미 기원전 3,000년대부터 1,400년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은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의 수세식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물이 흘러 가도록 시설하여 그 위에 배설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것과 그 원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있던 바빌로니아의 유적지인 고도(古都) 우르 지방에서도 기원전 2,200년의 수세의자식 변기가 발굴되었다. 하수관을 통해 분뇨를 수세용수(水洗用水)와 함께 건조한 모래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써서 강이나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크레타 섬의 크넷소스 궁전-지중해 미노아 문화의 중심지-에도 기원전 1,700년에 이미 도기(陶器)로 된 변을 받는 접시형 틀과 나무로 만든 변좌가 갖춰진 수세식 변기가 발굴되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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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뇨에 관한 문자의 기원 [ 1 / 1 page ] 

고대 중국 
오늘날 중국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것은 자라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에 돌로 만들 칼을 이용하여 사물의 모양을 본 딴 문자를 새긴 것을 말한다(불쌍한 자라들...).
중국의 고대 국가인 은나라의 각지에서 발굴된 이 수만 편의 갑골문은 현재 약3천 자가 해독되었는데 현대의 한자와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중 인간의 배설물에 관한 분뇨의 글자는 갑골문에서는 사람[人]자에 소변을 하는 모양을 그린 것이 [尿]자로 나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먹은 쌀이 변(異)해서 배설되었다는 뜻으로 [尿]자는 [糞]자로 변천 되었다. 따라서 이 [糞]자는 미곡(米穀) 즉, 곡식과 관계가 있으며 인류가 정착을 하고 농경 생활을 시작하던 시대 때 이미 사람들이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스카라베
이집트의 상징문자에 '스카라베'(문명이 발달 했으니 당연하겠지만...)라는 것이 있다. 스카라베는 사막에 살면서 그 사막을 지니는 낙타나 사람의 똥을 먹고 사는 곤충을 말한다. 이 곤충은 사람의 똥을 먹고 사는 곤충을 말한다(오늘날의 개똥벌레라고 생각하면 맞을 거 같다). 이 곤충은 사람이나 낙타의 똥이 떨어지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그것을 사막의 모래 위에 열심히 굴려 공 모양의 덩어리를 만들고 사막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것을 먹고, 그 속에 알을 낳으며 살아간다. 고대이집트인들은 재미있게도 이 곤충을 '태양의 사자' 또는 '신성한 곤충'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스타라베가 분(糞)을 굴리고 다니며 태양과 비슷한 구체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스카라베 모양을 고대 왕의 묘나 비석에 새겨 넣었다. 오늘날까지도 이집트 여자들은 반지나 브로치에 이 문양을 새겨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고대 분뇨의 처리 [ 2 / 1 page ] 

A Prologue? 
그 옛날 수렵을 하던 시대, 인간의 배설 행위는 장소와 시간에 전혀 구애 받지 않았다(보이는 곳이 모두 화장실로 좋은 장소였으니...). 넓은 대지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풀내를 맡으며 방분(放糞), 방뇨(放尿)의 짜릿한 희열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배설물은 땅에 스며들거나 비에 씻겨 흐르거나 태양열에 의하여 증발되었다. 어떤 때는 야생 동물이나 가축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경, 목축의 시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고 주거가 고정되면서 집단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배설물도 늘어나게 되어 자연의 처리에만 맡길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배설물을 건조 시켜 연료로 사용하거나 밭에 묻어 거름으로 썼다. 해변이나 강병에서는 배설물을 물에 씻어 보냈으며 목축민들은 가축에게 처리를 맡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람들은 지상의 주거 또는 나무 위에 이러한 배설물의 처리를 위한 장소 설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농경생활과 분뇨의 이용
수렵, 어로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넘어가던 무렵 사람들은 원래는 비옥했던 토지가 연작을 해감에 따라 지력의 감소로 농작물의 수확이 적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분뇨를 농경에 이용하기 시작했다(지금도 시골에 가면 그렇지만...).
강물에 흘려 보내거다 땅에 묻어 그냥 버리던 더러운 분뇨를 논, 밭에 비료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분양법은 중국에서는 이미 은나라 시대에 실시되었다. 은나라 시대의 문자인 갑골문 중에 '분서군전(糞西軍田)'이라는 지방의 밭에 똥을 뿌렸다는 뜻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미 분뇨를 농사에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도의 화루라파트의 주민들은 옥수수와 감자 재배에 분뇨를 사용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세 배 이상 되는 수확을 올렸다. 17세기 페르시아에서는 가축의 대소변을 농작에 이용했다. 멕시코와 페루에서는 비료로 사용되는 대소변을 일컬어 '옥수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들은 사람의 배설물을 비료로 대지에 환원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며,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유목민들도 밭에 가축의 분을 뿌리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 농사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분뇨만은 아주 더러운 것으로 여겨서 농사에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인분을 농사에 이용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것이 단지 더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두 문화권 주변의 나일강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정기적인 범람 때문에 언제나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분뇨의 처리 [ 2 / 2 page ] 

로마제국 
로마제국은 잘 정리된 상.하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시민들은 현대인들처럼 분뇨를 하수도에 버렸다. 따라서 당시 고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분뇨를 하수도에 흘려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아주 발전된 분뇨 처리 방법인 것 같지만, 결국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그 후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분뇨를 물에 씻어 보내는 방법을 그다지 즐겨 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1804~1885)는 "로마에 하수도가 생기면서 전원을 병들고 피폐해졌다. 그 결과 로마는 이태리의 하수도 속에 침천했다"고 말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멀리 떨어진 상수원-샘이나 계곡물-에 13개의 상수도를 설치했다. 이 수도의 깨끗한 물은 공공의 급수장은 물론 11개소의 공중 목욕장, 1,300개소 이상의 공공 분수대와 150개소의 수세식 공중 변소에 이용되었다.
로마 시대의 변소는 요즘 같은 인공 수세식이 아니고 자연 수세식 이었다. 즉 변기의 아래에 항상 물이 흐르도록 하여 오물을 씻어 내리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흘러 나오는 오수는 대하수도로 흘러 들게 되어 있었다. 공중 변소는 칸막이가 없고 여러 개의 변좌가 이어져 있어 사람들은 그 곳에 느긋하게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제국 로마의 자연은 점차 그들의 오물로 황폐해지고 있었다. 

동양의 정전법
농업용 비료에는 분뇨 이외에도 풀을 썩힌 초비, 나무나 풀을 태워 재로 만든 회비, 풀을 베어다 덮는 녹비, 분뇨를 짚 또는 풀과 모래를 섞어 발효시킨 퇴비등이 있다.
옛날에는 인구에 비해 유휴 농경지가 많았으므로 동양에서는 소위 정전법이라는 것이 실시되었다. 정전법이란 밭을 [田]자 모양으로 4등분하거나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해마다 그 구역을 차례로 돌아가며 곡식을 재배하는 방법을 말한다. 따라서 전법(田法)이라면 4년에 한 번씩, 정법(井法)이라면 9년에 한 번씩 윤작하는 셈이 된다. 이는 연작으로 인한 지력의 감소를 방지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이나 가축의 분(糞)을 농경에 이용한 것은 벌써 그 이전의 일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정전법은 사람이나 가축의 분을 밭에 뿌리는 이전의 방법이 연작으로 인한 지력의 감소를 막는 데 만족할 만한 방법이 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국의 은나라 시대부터 실시되어 온 것으로 여겨지는 정전법은 그 후 기자조선을 통해 한반도에 전해졌다고 하며, 한국의 경주에는 정전의 유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기자 동래설을 부인하는 사학자들은 이를 진한의 유제라고 하여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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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뇨의 처리 방법과 종류 [ 1 / 1 page ] 

A Prologue?
그렇다면 분뇨 처리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물로 처리하는 방법(Water Closet)", "건조 방법(Dry Closet)", 바람을 이용한 방법(Wind Closet)", "불로 이용하는 방법(Fire Closet)" 네가지가 있다.(분뇨 처리 방법이 상당히 많지요?).

수장형
일명, "물로 처리하는 방법" 이다. 이 방법의 첫번째 조건은 물이 풍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 등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토장형과 풍장형 그리고 화장형
강력한 태양광선을 이용한 방법이다. 상상이 가죠? 사막의 오아시스나 강물을 오염시키는 자는 사형 등 무거운 벌러 처벌했다(왜 그럴까요? 마실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따라서 이와 같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막의 뜨거운 모래 위에 방분뇨를 하여 오줌은 즉시 증발되고 분뇨는 건조되어 모래 바람에 작은 먼지로 날아가게 하였다. 이른바 "풍장" 으로 처리한 것이다.
또한 연료나 쓸 수목이 적은 초원지대에서는 소나 낙타, 사람의 분뇨를 모두 연료로 사용했으므로 "화장형" 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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