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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 환경 문화 운동

화장실 이야기(세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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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81회 작성일 17-01-19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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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http://www.shihwa.net/pandora/wc/story/story01.htm






화장실 이야기 [ 11 / 1 page ] 

화장지의 유래
便意(변의)가 있을 때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곳은 당연히 화장실이다. 그런데 막상 그 급한 용무를 끝내고 난 후에 가장 긴요하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만약이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마를때 까지 기다릴 것인가? 정답은 바로 화장지이다.

용변이 끝난 후 앉아서 손이 닿은 곳에 화장지가 없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종이가 최초 발명된 것은 2세기경 중국이었다. 일본에서는 애도 시대(1596~1868)에 와서야 귀족, 무사들이 종이로 뒤를 닦았다고 하는데 모두가 폐지 재생품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 초반까지도 종이로 뒤지 쓰는 것을 황송하게 여길 정도로 종이가 귀했다, 70년대부터 휴지가 차츰 공급되기 시작했으나 부유층만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용변을 본 후 화장지로 처리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지고 빈부의 차이를 가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종이가 귀했던 옛날로 조금만-정말로 조금만 되돌아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볏짚이나 채소나 나뭇잎 같은 것으로 뒷처리를 했다. 

손가락 물
인도의 뉴델리나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같은 대도시의 호텔이나 상류 주택에서는 수입한 외국제의 롤 페이퍼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들 나라의 빈민굴이나 시골에서는 손가락과 물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그들은 빈 깡통에 물을 담아 손가락으로 닦은 후 그 물로 손을 씻는다.

이 때 일반적으로 왼쪽 손의 손가락을 사용한다. 따라서 왼손을 '부정(不淨)의 손'이라고 부른다.태국의 대학 졸업식에서 국왕은 두 손으로 졸업증서를 건네 주지만, 학생은 왼쪽 손은 등 귀로 돌린 채 오른쪽 손만으로 받는다.

손가락 모래
손가락과 모래로 처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사막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막의 모래 위해 쭈그리고 앉아 변을 보는데 용변이 끝나면 개나 고양이처럼 모래로 그 위를 덮는다.

상류 계층은 적당한 용기에 사막의 모래를 담고 여기에 땀에 젖은 손가락 하나에 모래를 묻혀 그 손가락으로 뒤를 문지른다. 항문에 묻은 모래는 걸어 다니는 동안 저절로 떨어지게 되고 뒤를 닦은 손가락의 오물은 모래와 함께 툴 툴 털어낸다.때로는 생수병의 물로 그 손가락을 씻기도 하는데, 기름값보다 물값이 비싼 중동 지역의 특성을 감안해보면 결코 만만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사막의 모래는 우리나라 해안의 모래와는 달리 바람에 마모되어 입자가 매우 작다. 따라서 모래로 항문을 닦아낼 때의 통증 같은 것은 거의 느끼지 못한다. 끝도 없이 내리쬐는 태양의 직사 광선으로 수분은 즉시 증발되어 버리므로 분(糞)도 쉽게 건조되어 모래바람과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파리가 알을 낳을 틈도 없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니 이외로 위생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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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2 page ] 


이집트 등지의 사막에서 낙타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은 밭에 채이는 수많은 돌들 중에 작은 크기의 돌을 찾는다. 그들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뜨거운 열기를 식힌다. 그리고 그 돌로 용변 후 뒤를 닦는다. 바로 사용하면 너무 뜨거워서 화상(火傷)을 입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흙판 
흙판을 이용한다.흙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파키스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는 삼각형 모양의 뒤를 닦음 흙판이 출토된 적이 있다.흙으로 되어 있는 까닭에 돌처럼 뜨겁지도 않고 피부에 닿은 감촉도 좋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극히 최근까지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이 흙판을 신에게 바친 비스켓의 모조품으로 오해해서 클레이 케이크(Clay Cake)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나뭇잎이나 식물의 줄기래
나뭇잎으로 뒤를 처리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행해졌던 방법이다. 주로 등나무,무화과나무,감나무,떡갈나무 등의 넓은 모양의 잎을 사용했다. 무화과 나뭇잎은 치질에도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볏짚이나 벼,보리,마(麻),조 등도 자주 사용되었던 화장지 대용품이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많이 사용된 것으로 사실 알고 보면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농부들은 볏단의 볏짚을 몇 줄기 뽑아서 구겨서 뒤를 닦고는 변조에 버린다. 그렇게 하면 볏단을 변과 함께 썩어서 그대로 퇴비가 된다. 옥수수 수염과 옥수수 자루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의 옥수수 재배지역(Corn Belt)농가에서는 1950년대까지 화장실에 옥수수 수염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두고 그것으로 용변 후 뒤를 닦았다. 또 미국의 몬타나 주에서는 화장실에 비상용으로 옥수수 알을 털고 남은 자루를 비치하여 종이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나뭇잎이나 식물의 줄기래
밧줄을 뒷처리에 이용하는 방법은 중국의 황토 지대에서 사용되는 것과, 아프리카 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중국식은 '혼'이라고 하는 돼지 변소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황토층의 절벽에 우물처럼 구멍을 파서 그 밑을 경사지게 하고 그 아래에 돼지를 인분으로 사육하게 되어 있는 이 변소 안에는 세 가닥의 밧줄이 드리워져 있어 이 밧줄을 잡고 용변을 본 후, 용변이 끝나면 그 중 한 밧줄을 이용해서 뒤를 닦는다.공기가 매우 건조하므로 분은 즉시 말라서 밧줄을 흔들면 아래로 떨어진다.따라서 다음 사람이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 변소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대개 전기가 들어오지않는 지역일 경우가 많으므로 이 높고 위험한 변소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꼭 밧줄을 잡고 변을 보아야만 한다.아프리카식에서는 강의 상.하류에 나무 말뚝을 박고 밧줄을 강물의 흐름에 따라 물밑에 잠기도록 서로 묶는다.

용변을 본 후에는 강의 상류 쪽을 향해서 밧줄을 타고 뒤를 문지른다. 이렇게 하면 물의 흐름 때문에 몸이 앞으로 구부러져서 항문이 깨끗이 닦이게 된다.밧줄에 묻은 오물은 즉시 고기떼가 와서 깨끗이 먹어치우기 때문에 다음 사람이 와서 이용한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실로 멋진 수세 화장실인 셈이다. 일본에서도 새끼줄을 짧게 잘라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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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3 page ] 

대나무 조각과 나무 주걱
나무 조각이나 대나무 주걱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뒤를 닦는 주걱을 칙주(則籌), 칙간(則簡),칙간자(則簡子), 정목(淨木), 정주(淨籌), 주자(籌子)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나무껍질 
네팔 등지엔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찢어지지 않도록 두세 매를 서로 겹쳐 사용한다. 

해면 해조
지중해 연안의 여러 섬과 로마제국에서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건강과 미용은 화장실부터
"미용과 건강을 위해 강력한 설사를 권합니다."한때 이렇게 과격하기 그지없는 건강법이 있었다. 때는 16세기에서 18세기 무렵의 유럽, 당시에는 관장이나 설사제를 이용한 설사법이 처음에는 건강 요법으로, 후에는 미용 요법으로 적극 권장되었다. 이 해괴한 건강 미용 요법은 아주 인기가 좋았다고 하는데. 프랑스의 루이 13세 같은 사람은 1년 동안 212회나 관장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왕좌와 변기 사이를 끊임없이 왕보하는 고역을 갑수해야 했다. 당시 의사들의 견해로는 콧물을 흘리고 설사를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었다. 만약 설사를 하지 않고 콧물도 흘리지 않으면, 나쁜 체액이 체내에 쌓여 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불행하게도 루이 13세는 콧물도 흘리지 않았을 뿐 더러 설사를 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 13세의 주치의는 그에게 관장을 신중하게 권했고 그는 주치의의 말을 따랐다. 루이 13세의 주치의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것이 자랑스러워 의기 양양하게 기록을 남겼다. 「체액 조절을 위해 우리들은 관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가 및 관장 요법은 18세기에 이르러 미용법으로 탈바꿈해서 또다시 유행하게 된다. 설사를 해서 배를 비우는 것이 젊음을 되찾는 비결로 소문이 났도, 미용 체조 대신 관장과 설사제 복용이 일대 유행하기에 이른다. 이름하여 설사 미용법! 귀부인들은 침실에서 관장을 하는 미용법을 정기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시로써는 아주 자랑스러운 행위여서 자기가 관장하는 모습을 그린 가운을 침실에서 걸치거나 부채에 그리기까지 했다.

결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아하게 관장을 하는 것이 현대의 에어로빅과 별반 다른 게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관장하는 모습을 연인이나 정부들에게 보여 주기까지 했는데, 이것도 연애 방법으로서 이름하여 관장 유혹법이다. 설사하는 모습을 매혹적으로 여겼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인 듯싶다. 「그것이 알고 싶다. 설사! 설사와 관장 25시. 가장 현대적인 관장 미인의 비밀 대공개. 멋진 설사의 테크닉,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하는 관장. 설사 철저 대연구! 등」

근간 여성지의 기사 제목으로 뽑아 보자면 이쯤이 적당할 것 같다. 미용을 위해 설사를 하던 시대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차례로 등장했던 소위 이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용을 위해 설사를 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던 것을 보면, 이성의 힘이 화장실까지는 미처 닿지 못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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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4 page ] 

고양이 응아
고양이 응아란? 나쁜 짓을 하고도 시치미를 떼거나 주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몰래 자기 것으로 하는 행동을 말한다. 어째서 고양이의 변이 '시치미를 뗀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 고양이는 변을 본 후, 그것을 흙으로 덮어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다.

그래서 흔적이 없다. 어떤 관객이 공연중인 ' 코미디언을 웃겼다고 한다. 관객 왈, "아주 우스운 농담을 한 무더기 싸 보세요." 「개」: 배신자나 밀정, 염탐꾼을 가리킴. 이 말은 밀정이나 염탐꾼들이 개처럼 '냄새를 맡는다'는 뜻에서 유래됐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누구에게든 개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일단 개라고 낙인이 찍히면 변기에 얼굴을 처박히는 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밀정이나 염탐꾼을 응징하는 벌로써 아주 적절한 것이었는데, 개는 자신의 변을 먹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변기에 변절자의 얼굴을 처박으며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에도 시대(1596~1868)감옥에서도 오물을 먹이는 린치가 횡행했는데, 이 때문에 소위 '똥독'이 올라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슬픈 정조대
여러분들은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경험을 한 번 쯤 경험해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고통이 장시간 지속된다면 어떨까? 아마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화장실 출입이 장시간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으니, 그 예가 바로 정조대이다. 알다시피 중세 유럽에서는 십자군의 원정이 유행이었다.

회교도를 몰아내고 성지 수복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유럽의 군대가 서아시아로 원정을 갔었던 것이다. 인간사가 그렇듯이 이 숭고한 이념 아래서도 인간적인 고민은 남는 것.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사나이들의 고민은, 자기가 살아남을까보다는 그 동안에 아내가 정조를 지킬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십자군 참전 용사들은 졸렬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자기가 집을 비운 동안 아내가 절대 바람을 피우지 못하도록 고안한 장치. 바로 정조대였다. 가죽이나 혹은 철재로 만들어진 이 장치를 두고 그들은 꽤나 즐거워했으리라. 정조대는 열쇠 장치가 달린 가리개 모양인데. 그 열쇠는 절친한 친구(전장에서 잃어버리면 큰일이므로)나 친지에게 맡겼다. 그러나 사실 그 믿었던 친구들이 십자군 용사의 아내를 유혹하는 경우,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것을 만들어 낸 사람은 질투가 무척이나 많았던 12세기 이탈리아 사람이며, 13세기에는 이 정조대가 프랑스까지도 건너가 유행했다고 한다.

정조대는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계속 유행되어 15. 6세기의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용되었다. 정조대란 가죽이나 강철로 만들어진 콜셋으로. 일정의 지저귀라고 생각 하면 된다. 성기나 항문부분에는 조그마한 구멍 2개가 뚫려 있을 뿐이어서, 소변은 어찌어찌 해결한다 해도 대변일 경우에는 오물이 남을 수밖네 없는 구조이다. 더군다나 그 구멍에는 쇠못이 박혀 있어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구조이다. 요즘의 상식으로는 그런 부당한 일들을 견딜수 있었는지 역겨울 정도이지만. 건강을 이유로 목욕을 금기시하던 때이므로 대충 이해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오물이 쌓인 이 정조대 때문에, 성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귀부인들이 속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16세기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브랭톰이 그의 회상록『호색여결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정조대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서 매년 열리는 샹제르만 장터. 어느 부유한 상인이 정조대를 팔려고 이 장터에 나섰다. 질투심이 많은 남자들이 너도나도 정조대를 구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들의 부인들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몇 명의 귀부인들이 찾아와 이렇게 협박했다고 한다. "이런 잔인한 물건을 다시 한 번 장터에 내다 팔면 그때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그래도 정조대는 질투심 많은 남자들애게 인기가 있었고, 긴 여행은 잦은 상인들도 집을 비우는 동안 아내에게 이것을 착용시켰다. 정조대가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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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5 page ] 

옛날 화장실(일본의 성)
일본의 옛 성들은 강퍅해 보이는 외관이지만 어쨌든 역사의 갖가지 사건들이 벌어졌던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성의 화장실도 또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게 아닌가? 일본 최초의 천수각은 1579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지은 안토 성에 있다. 밖에서 보면 5층이지만 실제로는 7층인 이 성의 천수각에는 화장실이 세 개 있었다.

문은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그 화장실은 대변과 소변 보는 곳이 분리되어 있었다. 노부나가는 천수각의 3층에서 기거를 하고 있었으므로, 화장실에 갈 때마다 "화장실에 다녀올게"라며 계단을 급히 내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안토 성의 화장실이 다른 성들의 화장실을 꾸미는 기준이 되었고, 따라서 어떤 성이든 간에 천수각의 화장실은 입구와 1층 또는 지하의 동북부 구석 자리에 지어졌다.

그러면 화장실의 내부는 어떠했을까? 희로 성의 화장실은 지하에 두 곳이 있고 각각 세 개의 방이 연이어 있다. 즉, 현대의 공중 화장실처럼 화장실 세 곳이 나란히 있는 것이다. 화장실 내부는 복도보다도 한 단 높게 만들어져 있고, 안에는 목제 변기가 있다. 목제 변기 아래쪽으로 구멍이 나 있어서, 배설한 변을 모으게 되어 있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의 동쪽 화장실은 배설물이 마루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밖으로 흘러가게끔 설계가 되어있다. 그래서 이 성의 돌담 아래는 배설물 투성이었다.

성 안의 화장실에 모은 배설물은 해자(중세 도시의 성 주변을 깊게 파 물을 채워 넣어 적들의 침입을 막았던 구조물)에 버려졌다. 천수각에서 해자 쪽으로 구멍을 파서 그곳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배설물들이 흘러 가게 만든 것이다. 현재 발굴되고 있는 성 주변 해자의 흔적 중에는 이 배설물들이 흘러 가게 파 놓을 도랑들이 대부분일 것으로 믿어진다.

소변은 나무통에 모아서 직접 돌담 밑에 내다 부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해자로 흘러 들어가게 만들었다. 결국 성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깊고 커다란 해자는 오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막부 말기에 에도 성의 경우는 오물이 해자를 가득 메우는 바람에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새들이 떠나 버릴 정도 였다고 한다.

지금 에도성 주변 호수에 사는 까마귀들도 막부 말엽의 성 주위 해자에 몰아넣었더라면 오물을 뒤집어쓰고 즉사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또 성을 방어하는 병사가 오물을 성 밖에 내다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배설물을 성 안에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문화재로써 많은 사람들이 찾고 감탄해 마지않는 성들이지만, 그 옛날에는 무척이나 냄새가 나던 때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랴? 개도 부지런해야 더운 똥을 얻어먹는다. ☞ 사람이 잘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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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6 page ] 

뒤닦기똥닦기
일본 헤이안 시대(782∼1185)서민들의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볼일을 보았을까? 물론 길이나 숲에서 해결을 했으며, 아이들은 적당한 공터에서 해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기록으로 아귀초자(빨조후구)라는 두루마리 그림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서민들의 볼일 보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종의 풍속화모음집 같은 것으로, 특이하게도 볼일 보는 모습을 강조한 것이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토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버젓이 볼일을 보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땅바닥에는 오물과 함께 나무젓가락 같은 것이 흩어져 있는 것도 보이는데, 이것이 일명 '변주걱' 이라 하는 것이다. 휴지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므로, 말하자면 휴지 대용으로 쓰였던 오물 처리용 기구인 것이다. 볼일을 본 뒤 뒤를 닦아 내는 막대기인데, 우리 나라 산간의 절에서도 이런 막대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좀더 적나라하게 똥막대기라고 하는데, 어느 선승이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자, 그의 스승은 똥막대기라는 화두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 똥막대기인 것이다. 아무튼 막대기를 이용해서 뒤를 닦는 것은 무작정 나온 풍습이 아리다 당시의 주식은 쌀이 아니라 조나 피 등의 잡곡이었는데, 이 경우 오물이 잘 굳어지므로 '변주걱' 으로 한번 쓱 문질러 내기만 하면 되었다고 한다. 이 거리의 화장실을 사용할 때에는 모두 굽이 높은 게다 (일본식 나막신)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

대소변이 튀거나, 옷자락이 늘어져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굽이 높은 게다는 비쌌기 때문에 서민들을 보통 맨발이나 짚신이 고작이었다. 아마 굽이 높은 게다는 볼일은 볼 때만 신었던 모양이다. 서양의 하이힐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게다 또한 볼일 보는 데 필요해서 발전한 신발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고전 『우지슈이모노가따리』(일본의 설화집)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변골목'이라는 지명을 들은 천황이 "이름이 너무 지저분하지 않느냐?" '비단골목'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도록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비단 골목' 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는데, 물론 그 진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한 의견이 이렇다.

「헤이안 시대에 변골목 부근에는 만물상들이 모여 있는데, 그 이름들이 변해 쿠소(변) 골목이 되었다. 그런 뒤 이 만물상들이 모두 포목점으로 바뀌게 되자, 바단 골목이 불리우게 되었다.」일본에 본격적인 화장실 설비가 마련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인데, 갑자기 위생 관념이 높아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분뇨가 농사에 쓰이는 비료로 이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마꾸라 시대(1185~1329)의 일이다. 똥은 건드릴수록 구린내만 난다. ☞ 어리석거나 좋지 못한 사람과 친하게 되면 해만 입게 되니,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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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7 page ] 

유럽 화장실의 야만적인 역사
300년 전쯤 프랑스의 토로와라는 곳의 시민들은 옛부터 집안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보아 거리'라고 하는 길거리를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관청에서는 시민들에게 각자의 집에 화장실을 만들도록 종용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볼일을 보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다. 그러자 시민들은 시청 건물 앞에서 항의를 했고, 대표를 뽑아 관청의 결정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관청에서 일하시는 여러분, 우리들의 선조들은 항상 거리에서 볼일을 보았소.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손들도 전통대로 계속 이 거리에서 볼일을 보게 될 것이오" 관청에서도 시민들의 이러한 아우성에 어쩔 수 없이 노상 화장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주민들은 '보아 거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고, 기쁨의 표시로 배변을 해서 오물이 산처럼 쌓이도록 해 놓았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도시에서는 분뇨와 쓰레기를 모두 도로에 내다 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므로, 거리가 오물로 진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든지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명이 '뒷간 거리' 혹은 '변소 거리' 이다. 이런 실정이므로 비라도 내리면 어느 마을의 도로이건 간에 쓰레기와 진흙과 분뇨가 범벅이 되어 진창을 만들기 일쑤였다. 말의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진창이었고, 그 진창에 빠져 죽는 가축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빠져 죽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인사불성이 된 취객이 발을 헛디뎌 진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기진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였다. 파리의 포장된 큰 거리에서 도로의 중앙에는 아주 넓은 분뇨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길을 횡단하려면 이 분뇨 개천 위를 가로지른 널빤지 다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성의 경우라면 문제가 심각했다.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당시의 여성들의 머리 장식은 높이가 탑만큼이나 높았고, 치마 또한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귀족 부인들은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힘센 젊은이를 돈으로 사서 업힌 다음 건너는 일도 많았다. 이것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인들이 있었다고 하니. 직업치고는 희비가 엇갈리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풍만한 여성들을 매번 업을 수 있었으니 좋았겠지만, 오물 개천에 발을 담그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1797년 프랑스의 한 시민이 불평을 했다.

"파리의 불결함은 너무 지독해서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번들번들하고 미끄러운 진창으로 덮힌 울퉁불퉁한 보도를 걷는데, 빨리 걸으려고 하면 미끄러지고 설령 일어나려 해도 체중을 이기지 못해 구르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보도까지도 오물로 미끄러울 지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지경이 된 것일까?

1843년의 「파리시 공보」를 보면 그 이유를 쉽사리 알 수가 있다.「벌건 대낮에도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전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유럽 각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거리에서 볼일 보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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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8 page ] 

침팬지는 뒤를 어떻게 닦을까?
동물은 화장실을 따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영역, 즉 자기가 지배하는 영토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배설물을 이용한다. 견공들이 전봇대만 보면 달려들어 한쪽 다리를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내 영토에 속한 곳이니 다른 개들은 얼씬도 하지 말아라. 하는 경고 표시인 셈이다. 덩치 큰 하마도 배설물로 자신의 영역을 나타낸다.

하마는 배변을 하면서 엉덩이와 짤막한 꼬리를 바쁘게 흔들어 가능한 한 넓은 범위로 그것들을 흩어 놓는다. 방귀도 장쾌하게 뀌어서 독한 냄새까지 섞어 놓는다니. 사실 다른 동물들이 피해가게도 생겼다. 다만 이런 배설물 처리는 수컷만의 전용 방법이고 암컷은 물 속에서 일을 해결한다고 한다. 하마의 새끼는 생후 1주일 동안 어미의 배설물을 먹는데, 이는 그 배설 물이 소화를 돕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구르트처럼 소화를 돕는 미생물이 어미의 배설물에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다.

조금은 지저분한 요구르트다. 동물원의 아기 하마는 수조의 물을 갈아 넣을 때면 물속에 남아 있던 어미의 배설물을 미친 듯이 먹는다. 그리고 하마에게는 변비가 자주 생기는데, 식이 요법이나 변비약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물로써 엉덩이를 자극하면 효과를 볼 수가 있다. 하마가 수륙양생의 동물인 것은 그의 피부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은 변비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하마는 근처에 물이 없는 곳에서는 배설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침팬지의 배설 습관은 인간에 가깝다. 배변 후 나뭇가지나 잎으로 반드시 뒤를 닦는다. 배설물의 크기로 말하자면 코끼리를 당할 동물이 없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다리가 5개로 보일 만큼 배설물이 거대하다. 오줌은 1회에 양동이 5.6통 분량을 쏟고, 대변의 경우는 약 70kg이나 된다. 그러면 벼룩의 배설물은 과연 어느 정도 일까? 무게를 달 수 없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벼룩은 하지 않는다. 배설을 입으로 한다는 것이다.

개구리도 역시 입으로 배설한다. 동면을 하는 경우는 어떨까? 동면을 하는 동물들은 그 동안에는 절대로 배설을 곰은 동면을 위해 가을 무렴 닥치는 대로 마구 먹고는 마지막으로 송진을 디저트로 삼아서 먹는다. 송진이 항문을 막아 고의 적인 변비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곰의 경우 동면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겨우내 못 했던 배변을 하는 것이다. 그 배설물이 대단히 딱딱하기 때문에 나무의 새순이나 물기를 머금은 풀을 먹어 부드럽게 해야만 하는데, 가장 선호하는 배변용 식품은 야생 부추라고 한다. 그래서 곰이 동면하는 굴 근처에는 꼭 부추밭이 있으므로 수렵꾼들은 종종 이 부추밭을 이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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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9 page ] 

화장실에서 생겨난 약
기원전 8세기부터 5세기에 거쳐, 로마 각지에는 공중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가스토락 불리는 항아리를 땅에 묻고 여기에 오줌을 받았는데 거기에서 생기는 물질을 뽑아 생활에 이용했다고 한다. 일본에서처럼 비료로 쓰여진 게 아니었다고 하느데.... 로마인들은 이것으로 비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냥 물로 빨거나 방망이로 두드려서, 혹은 잿물을 쓰는 빨랠 방법도 있었지만 오줌으로 비누를 만들어서 빨래할 때 사용했다고 전한다. 원래 오줌에는 땟국을 빼는 성분이 들어 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까지 여자들이 오줌으로 머리를 감았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도 전해진다. 에스키모들은 최근까지도 오줌을 이용해 머리를 감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줌에 포한되어 있는 암모니아가 머리카락의 때나 지방을 없애 주기 때문으로 아주 과학적인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혐오감은 별무제이지만, 로마인들은 오줌의 이러한 효과에 착안해서 빨랫비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 중에 하나일 텐데, 오줌에는 이밖에도 신비한 여러 가지 효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요즘에는 오줌에서 추출한 물질로 약을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한술 더떠서 『왜지』라는 책에는 분뇨로 약을 만들어 복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대변의 즙을 짜서 환자에게 처방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용하는 학교나 군대의 화장시에 하얀 소변통이 비치되어 있고, 이를 「녹십자」에서 수거해 약을 제조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바뀌어 거의 볼 수 없지만, 한 겨울에 구슬치기를 하다 손이 틀 때면 제가 눈 오줌에 손을 씻게하는 민간요법도 있었다.

17세기 루이 13세 때의 재상이었던 리슐리에는 죽기직전에 말똥을 섞은 술을 마셨다고 하며, 18세기 프랑스의 의사였던 포샤르는 치통에 오줌을 처방해서 환자가 자신의 오줌으로 이를 닦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인도의 전 수상인 다사이도 매일 아침 오줌을 마시고부터는 일생동안 병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배설물을 약으로 쓰는 방법은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는 외국, 특히 당나라와의 교류가 빈번했는데, 당시로써는 최첨단의 의학도 수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소개를 하자면, 미친 개에게 물렸을 때는 인분을 상처에 바른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무로마치 시대(1390~1596)에는 장이나 뇌가 나쁠 때 아기의 똥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요즘 많이 쓰이는 비타민제나 호르몬제 등도 오줌에서 추출한 물질로 만든 것들이 아주 많다.

독일의 알베르트 폰 르 코크는 파키스탄을 여행하는 도중에, 그 지방 사람들이 말의 등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어린 아이의 오줌을 바른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오줌에 포함된 암모니아가 해독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불결한 느낌과는 달리 응급 조치로써 효과가 상당했다고 한다. 만약 분뇨가 자연 그대로 약의 역할을 다해 준다면 사람들은 집에서도 약을 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약의 명칭이야 좀 야릇하겠지만. 우는 아이 똥 먹인다.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방해를 놓아 더 곤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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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10 page ] 

마시자 한잔의 소변
아프리카 남서부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은 소변을 '사막의 물'이라고 부르며 정말로 물 대신 소변을 마신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일본 오키나와 사람들 중 몇몇은 상륙한 미군에 쫒겨 섬의 동굴 깊은 곳에 숨었다.

일본인들 말로 미축귀영(美畜鬼英 짐승 같은 미국과 악귀 같은 영국)의 그 미군들이었으니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동굴에 숨어 굶주림 때문에 지독한 고생을 했는데, 그 허기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이 갈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변을 마시기 시작했다는데..... 동굴에 있었던 한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5일 동안이나 물을 마시지 못했고, 아이들은 갈증에 못 이겨 울어대는 지옥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을 구할 방법은 없어서 궁리 끝에 소변을 모아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소변이라도 변변히 나올 리가 없었지요. 겨우 찻잔으로 절반 정도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적은 양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애들에게만 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변이 물을 대신하는 경우는 대개 이렇듯 극한적인 상황에서이다.

그런데 그 맛은 어떨까? 자신의 소변을 마신 남성의 고백을 들어보자. "짜고 냄새가 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단, 배설하고 오랜 시간이 경과한 오줌은 부패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 수세식 화장실이 청결한 것도 배설물을 즉시 흘려 보내기 때문이 아닌가" 그럴 듯한 말이다. 소변을 마시는 일에 대해 악덕이나 미덕이라고 판단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기호의 문제이니까, 오줌에는 건강을 위해 자기 오줌을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변비의 세계 기록
영국의 저널리스트가 세계의 기록을 모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책에는 '변비의 세계 기록은 102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70일 간의 변비로 사망한 예도 있으므로 변비를 인내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의 변비 기록은 어떻게 될까?

1808년의 한 기록에 30세 남성의 실례가 전해진다. 이 사람은 10년 간이나 그야말로 만성적인 변비로 고생해 왔는데, 20일에서 24일에 한 번 볼일을 보는 정도였으므로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변비가 심해지면, 체중이 감소하고 마르는 데도 불구하고 식욕은 감퇴하지 않은 채 오히려 보통 사람의 2배 정도를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외에 이렇다 할 증상은 나타나지 않으며 맥박, 체온 등도 모두 정상이라고 한다, 변비는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을 도 주는 병이라 한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현대 의학에서 변비로 규정하는 경우 5일 이상 배설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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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 11 / 11 page ] 

황금함대-분뇨처리배
옛날 일본 에도 성의 화장실에서 나온 어물들은 배에 실려 바다로 내보내 처리했다. 그 관리자가 갈서(曷西)였기 때문에, 오물을 실어 나르던 그 배를 '갈서선' 혹은 '지류고보지(志留古保志)'라고 했다.

지류고보지아고 하는 것은 한층 우아한 이름이지만, 원래 '오줌 그릇'의 뜻이었으므로 그리 향기로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매일 아침에도 성에는 두 대의 배가 방문했는데, 한 척은 성내의 쓰레기 나머지 한 척은 분뇨를 퍼갔다. 어쨌든 천하를 제패한 영주의 대소변을 가득 실었기에 위세가 대단했었던가 보다.이 배가 접근하면 근처의 배들은 뱃길을 내주어야 했으며, 부딪히기라고 하면 "고귀하고 높은 분의 응아를 싣고 있는 것도 몰라보고" 운운하며 공연히 허세를 부렸다.

이 갈서선은 주변의 다른 배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오가던 뱃길은 혼탁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더러운 것을 싣고 다니며 더러운 짓까지 도맡아 했던 것이다. 이를 비꼬느라 오줌 그릇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요즘에도 이 갈서선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동경의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분뇨를 배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바다에 그냥 버리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대로 버린다면 거품으로 떠오르거나 조수를 따라 해안으로 다시 밀려올 것이다. 그래서 일단 분뇨에 유화제 1철을 섞어 무겁게 만든 다음, 바다에 던져 깊이 가라앉히는 것이다. 분뇨가 버려지는 장소는 동경에서 300Km쯤 떨어진 해저라고 한다.

동경뿐만 아니라 가와사키와 요코하마 등지에서도 현대판 갈서선이 활약 중인데, 모르긴 몰라도 분뇨를 버리는 해저의 풍경은 그로테스크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 현대판 갈서선들을 이름하여 '황금 함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 황금 함대 소속의 오물 처리선 중에는 목적지에 닿기 전에 아무데나 분뇨를 버리는 얌체선이 있어서 지탄을 받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 옛날 오줌 그릇 노릇을 하던 갈서선의 현대판인 것이다. 

화장실에서 싹트는 치정
화장실에 몰래 가는 짓이 대개 음란한 짓거리를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밤중에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남녀가 몰래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남녀 하인들의 밀회장소로. 또는 젊은 중과 아가씨, 옆집 아낙과 바람둥이 홀아비 등 갖가지 부류의 정사가 벌어지는 장소였던 것이다. 오뉴월의 보리밭 정사는 풍요의 기원 행위라고도 하지만. 화장실에서의 밀통이라면 격이 좀 낮다.

일본인들이 성에 관한 한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화장실 전문 매음 당시 일본의 화장실은 항아리 위에 판자를 걸쳐 놓은 단순한 구조였는데, 정사에 열중한 남녀가 이를 염두에 둘 여유가 있었으랴. 자칫하면 똥통 속에 두 사람이 텀벙 빠지는 수밖에. 그 시대 일본의 화장실이란 문이 반쪽밖에 달려 있지 않아서 자리를 잡으면 얼굴이나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내밀해야 할 화장실 안쪽의 비경(?)이 밖에서 훤히 보이고, 이 때문인지 간통의 발각이 아주 용이했다는 말씀. 일설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화장실에서만 하는 창녀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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