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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장실 문화 (우리나라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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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27회 작성일 17-01-1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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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법의 전래와 분뇨의 이용

역사적으로 볼 때 인분을 저류하게 된 것은 분양법을 도입하면서부터이다. 인분을 퇴비로 하여 지력의 쇠퇴를 방지하고 농작물의 수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분양법이 사용되었다. 결국 분양법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변소가 언제부터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는가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미 중국의 은나라때부터 사실상 전답에 분을 뿌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서단전'이라는 갑골문의 해독을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따라서 분양법이 시작된 시기를 이때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당시의 유적으로 바퀴가 하나로 된 일륜차가 종종 발견되는데 그 중에는 분뇨를 운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이는 분뇨를 논 밭으로 운반하여 작물에 비료로 사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인분을 떡처럼 만들어 이를 건조시켜 두었다가 논 밭의 흙에 섞기도 했는데 이를 분병이라고 불렀다.

고대 중국의 이러한 농경법은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은의 봉왕 신의 숙부인 기자가 정전법을 간언했다가 받아 들여지지 않게 되자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기자조선을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 기자조선이 실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사학자들 간에 여러 의견이 분분하니 그 자체에 관한 것은 논외로 치더라고 이때 은의 분양법이 한번도에 전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이 때 정전법은 9년만에 정법이 아니라 4년만에 농사를 짓는 전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양법과 정전법은 그 후 삼한 시대를 거쳐 신라에도 전해졌다. 지금도 경주에는 이 정전의 유지가 남아 있다.

----------------------------------------------------------------------------------------- 한국의 요강문화

분뇨를 퇴비로 이용하던 농경 문화권에서는 되도록 후미지고 먼 곳에 칙간을 두어 분뇨를 배설하고 저류했다.

생리적으로 자주 배설해야만 하는 소변까지 칙간을 이용할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편리하게 이용해 온 간이식 변기가 바료 요강이라는 그릇이었는데, 중국에는 요강과 비슷한 수병이라는 소변기가 잇었다.

농경 문화와는 깊은 관계가 없었지만 생활의 필요에 따라 유럽에서도 일찍이 '볼타르'나 '오마르'같은 변기가 있어서 널리 이용되었다. 요강은 마치 작은 항아리처럼 생긴 것으로 그 위에 뚜껑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그 크기와 용량이 다양하고 모양은 밑이 둥글게 넓고 배가 볼록하여 넘어질 염려가 없었다. 재료의 종류도 유기, 청동, 청자, 백자 외에도 도기, 자기, 오동나무에 옻칠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 궁중의 칙간과 변기

우리나라의 궁중에서 사용해온 뒷간에 대한 문헌은 아직 이렇다 하게 발견된 것이 없다. 현존하는 고궁의 설계도를 보아도 칙간은 없고 다만, 창덕궁 대조전에서 회랑으로 연결된 경운각 뒷편에서 유일하게 칙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경운각의 모난 뒷칸은 당시의 욕실이고 그 옆의 작은 칸이 뒷간으로 쓰였다고 추측되는데 마루에는 배설구로 보이는 긴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다. 마루에서 땅바닥은 약 70센티미터 높이의 공간이고 밖에 있는 문 두짝을 열고 보면 그 속에 7센티미터 가량의 네 바퀴(30×70센티미터)가 달린 끌개 한 대가 있다. 끌개 위에는 3센티미터 높이의 칠테가 둥글게 박혀 있는데 그 위에 배설물을 담는 그릇을 얹어 두었다가 밖으로 끌어내는 데 쓰여진 유물같이 생각된다.

----------------------------------------------------------------------------------------- 한국의 칙간의 유형

<한국 민족 문화 백과사전>에 기록된 한국 측간의 유형을 보면 측간이란 대소변을 배설하는 장소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집이나 시설, 뒷간, 헛간, 복수간, 통시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 중에는 혼자 사용하는 것과 여럿이 동시에 사용하는 것, 남녀가 따로 사용하는 것 또는 다른 시설과 하께 있는 것 등 그 용도에 따라 내칙(內 ), 외칙(外厠), 중칙(重厠), 북수(北水), 목방(沐房), 세답방(洗踏房) 등으로 달리 이름지어 부른다고 되어 있다.

------------------------------------------------------------------------------------------ 칙신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속신앙의 하나로 변소 귀신( 神)이 있다고 믿어 왔다. 이에 대해 민속학자 임동권 씨는 "한국에서는 칙신( 神)을 칙귀( 鬼)라고 불렀는데 이 귀신은 성질이 고약한 여신(女神)으로서 매월 6일, 16일, 26일과 같이 6자가 들어가 있는 날에는 변소에 있지만 그 외의 날엔 밖에 나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6자가 들어있는 날엔 변소에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뒷간을 항상 안채나 사랑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다 특히 상류 가정의 안뒷간은 부엌 옆 마당의 디딜방앗간 벽에 붙여 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지어 사랑채 뒷간은 대문 밖에 두기까지 했다. 따라서 밤늦게 드나들 때에는 공포를 자아내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공포심이 뒷간 귀신의 존재를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확신하게 말들었다.

뒷간 귀신의 신앙은 변소각시(전남, 경북), 칙간 조신(전남), 정낭각시(전남, 경북), 변소장군(경북), 칙시부인(제주도), 칙도부인(제주도) 등으로 전국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지만 귀신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개가 여자 귀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은 뒤에 반드시 길일(吉日)을 받아 제물과 부적을 갖추고 탈이 없도록 해달라고 고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때문에 시월 상당 고사 때는 반드시 뒷간에 떡을 바쳤다. 또 아이들이 똥구덩이에 신을 빠뜨리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에도 떡을 해 놓고 액땜을 빌었다. 이 뒷간 귀신은 긴 머리칼을 발에 걸고 헤아리는 버릇이 있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씌우는데 귀신을 만난 사람들은 이때부터 앓다가 결국 죽게 된다고 믿었다. 칙간에 갈 때 세 걸음 내지 다섯 걸음 정도 앞에서 두서너 번 기침 소리를 내면 귀신이 피한다는 기록도 있고, 제주도의 칙시부인은 원래 문신(門神)이었던 남(南)선비의 첩이었으나 본처를 죽였다가 그 아들에게 복수를 당해 뒷간 귀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집안의 귀신들은 대개 무병장수와 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착한 귀신인데 뒷간신망은 성품이 별나서 잘 받들지 않으면 화를 입히는 못된 귀신이라고 믿었다.

옛날 시골에서는 흔히 어린이에게 "똥떡 구워 준다"든가 "다리 밑에 똥떡 어미 애를 주워 왔다" 든가 하면서 놀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한술 더 떠서 그 "똥떡 어미가 너를 데리러 온다" 는 말로 거듭 놀려서 정말인 중 알고 겁에 질려 우는 아이를 보고 웃는 민간 풍습이 있었다.

------------------------------------------------------------------------------------------ 제주도의 돼지 뒷간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민간 변소 중 가장 오래된 형태 가운데 하나가 제주도에 있는 돼지 뒷간이다. 이는 중국 한 대(漢代)의 변소나 일본 오키나와의 돼지 변소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제주도의 돼지 뒷간은 토담으로 돼지우리를 쌓고 주거하는 집 가까운 옆쪽에 돌담을 둘러쌓아서 변소를 지었다. 그 위에 지붕을 덮은 후 변소 안에 앉아서도 밖을 쉽게 내다 볼 수 있도록 쪽문을 해서 달았다. 제주도에서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나 몽고군의 침략 등 외침이 잦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생활양식이 외침을 쉽게 식별하고 재빨리 피난 할 수 있도록 발전되었다. 돼지 변소의 쪽문도 그런 맥락에서 짐작할 만하다.

변소의 아랫부분은 돼지우리와 통하게 되어 있어서 사람이 변소에 들어가면 돼지가 달려와 사람의 배변을 재촉하는 뜻으로 꿀꿀거린다. 어떤 곳은 밑 부분을 돼지우리 쪽으로 경사지게 하여 분뇨가 자연스럽게 미끄러지게 한 곳도 있고 돼지의 주둥이나 머리만 변소 밑 부분으로 밀어 넣을 수 있도록 작은 통로를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돼지의 혓바닥이 사람의 궁둥이를 핥거나 코로 문지르게 되는 웃지 못할 일도 종종 벌어진다. 제주도식 뒷간은 함경북도 회령과 강원도 양구, 경남 충무, 거창, 함양, 전남 광양 등지에도 있었다고 하며 중국의 내몽골 일대와 일본의 오키나와, 필리핀에도 두루 분포되어 있다. 이렇게 돼지 뒷간에서 키운 돼지는 '똥돼지'라 불리는데 그 맛이 더욱 좋다고 한다.

------------------------------------------------------------------------------------------ 조선시대 농촌의 뒷간

조선시대 농가 화장실은 대부분 본체와는 떨어진 사랑채옆이나 대문에 가까운 마당의 한 쪽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내부는 큰항아리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두 개의 나무판을 걸쳐 가운데에 변을 볼 수 있도록 공간을 띄워 놓은 것이었다. 때로는 앞에 소변의 흩어짐을 막는 나무판을 대어 놓은 것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변소의 문이 있는 쪽을 향해 앉는데 반해 일본 사람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앉는 관습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안쪽 벽면을 향해 앉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출입문 쪽을 향해 앉게 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해석이 있다. 첫째는 방위 본능에서 출입문 쪽에 어떤 침입자가 나타날 때 쉽게 대항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막힌 벽을 향해 앉기보다는 열린 곳을 향해 앉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다. 셋째는 노크하기 쉽게 하기 위해 서라고도 하고, 넷째는 냄새를 줄이기 위해 서라고도 한다.

사실 당시의 변소는 들어서기가 두려울 정도로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따라서 변소의 벽도 얕게 담을 치거나 앞문도 없이 거적을 걸어 놓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문쪽을 향해 앉으면 바깥 공기를 가까이 호흡하여 분뇨의 냄새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농가에 따라서는 항아리 위에 통나무 여러 개를 새끼로 묶어 걸치고 가운데만 대소변이 떨어질 수 있도록 비워 놓은 형태도 많았다. 용변 후에는 짚이나 나뭇잎, 채소, 옥수수 수염 등으로 뒤를 닦고 이들도 함께 변기 속에 버려서 분뇨와 함께 퇴비로 사용했다.

일본에서 발견된 백제 유적에서는 뒤를 닦는 주걱이 많이 나왔는데 길이 20∼25센티미터 너비는 1∼2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이때에는 쪽박을 긴 나무 막대에 묶어 분뇨를 퍼내고 그것을 '똥장기'에 담아 운반했다.

이 분뇨 운반용 장기를 일명 '똥물장기'라고도 했는데 나무의 여러 쪽을 둥글게 짝을 맞추어 대나무 쪽으로 테를 치고, 분뇨를 퍼내는 입구를 좁게 만들어서 운반시에 내용물이 잘 쏟아지지 않게 해다. 똥물장기는 지게로 지고 운반하거나 먼 거리는 소의 등이나 우마차에 싣고 운반하기도 했다. 어떤 농가에서는 처마밑에 소변과 대변통을 따로 설치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쇠죽통을 소변통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농촌의 뒷간은 전국에 걸쳐 지붕이 없는 것이 상당수였다. 장마철 빗물에 넘쳐 분뇨가 흘러 나와도 예사롭게 생각했는데 농사에 소용되는 귀중한 비료인 분뇨량이 불어라는 것을 그런대로 묵과했다는 점과 뒷간의 자연 청소라는 의식이 겹쳐져서 그랬던 것 같다. 영남 일대 농촌에서도 지붕 없는 뒷간이 일반적이였으며 소슬대문 부자집에도 뒷간은 지붕 없이 그냥 흙담에 에워싸여 있었다.

------------------------------------------------------------------------------------------ 근세 서울의 분뇨 처리

말은 제주도에서, 사람은 서울에서 커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침체의 역사에서 개화기를 맞고 개화기에서 근대화가 이룩되던 시기에 서울에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분뇨의 처리 문제였다. 6.25 사변이 날 때 100만이었던 서울의 인구는 수복 후부터 시작된 50년대의 무질서한 팽창을 계속했다. 해방촌을 비롯한 서울의 산과 숲은 판자촌으로 바뀌었고 청계천이 탁계천이 되어 공해의 시궁창으로 변해버렸다.

8.15 해방에서 60년대 초까지만 해도서울의 변소는 담밑 또는 울타리 밖에서 분뇨를 퍼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길쪽에서 분뇨를 퍼내는 집들이 많았다. 물론 평소에는 그 구멍을 나무 판자로 막아 밖에서 분뇨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서울 근교의 농민들은 시내에 들어와서 돈을 주고 변을 퍼가기도 했다. 농부들은 변을 퍼가게 해준 대가로 취사용 땔감이나 채소, 과일, 김장거리들을 사례하였다.

지난 날 한식 가옥 설계에 있어서 변소는 가장 무시되고 천대받는 부분이었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것은 장독대였을 뿐 변소는 담 모퉁이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있는 것이 고작이었고 변두리 영세 가옥을 지을 때는 설계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 화장실 명칭의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변소를 먼 옛날부터 '뒷간'이라고 불렀다. '뒤를 본다'라는 말을 '똥을 눈다'라는 순 우리말이다. 초대 국회 때 어느 의원이 손을 들어 발언을 신청한 뒤 ' 뒤 좀 보고 오겠다'는 발언을 해서 항간(巷間)에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된 적까지 있을 정도이다. 뒷간이라는 말 이외에는 '칙간(厠]間)', '정낭', '통숫간' 이란 말들도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 사전(辭典)에서는 '칙간'은 강원도와 전라도 지방의 사투리이고, '정낭'은 함경도 지방의 사투리이며, '통숫간'은 그냥 방언(方言)이라고만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풀이들 역시 부정확한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데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변소를 두고 뒷간, 칙간, 통수간 등의 용어가 고루 다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똥구당 혹은 똥구덩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또 통시 혹은 통싯간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통숫간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고루 쓰였던 말만 대충 꼽아도 뒷간, 칙간(厠間), 정낭, 통싯간, 똥 통싯간, 똥구당, 변소 등 여러 가지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변소를 가르키는 한자의 [厠]은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원래 변소는 [ ]이고 [厠]은 [ ]의 속자(俗字)로 우리나라에서는 '측'이라고 잘못 읽히고 있다. 변소의 뜻으로 '치', 기운다는 뜻으로 '칙'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씨는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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