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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 환경 문화 운동

유럽 - 화장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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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42회 작성일 17-01-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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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편

-유럽의 화장실 역사

고대 힌두교도들에게 위생이라는 사항은 거의 종교적인 철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이미 기원전 3000여 년경에 화장실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 골짜기에서는 테라코타(Terra Cotta)로 된 파이프가 갖춰진 개인용과 공중 목욕탕이 발굴되기도 하였는데 놀랍게도 이 시설에는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수도꼭지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유럽에서의 화장실 역사는 1만년 전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배설물의 독성―이것이 배설물을 받아들일 때의 동양과 서양의 가장 큰 관점 차이다―을 잘 알고 있던 고대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이 있는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용무를 해결했다. 하지만 배설물을 집에서부터 씻어 내버릴 수 있는 수세식 배관 시스템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연안 오크니섬 주민들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하수구가 돌집에서 개천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추위에 떨며 밖에서 용무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정교하기로 치자면 크레타 섬의 크넷소스 궁전에 살았던 미노아 왕족의 화장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기원전 3000년에 미노아 왕족들은 시멘트로 틈새를 이은 수직 석제 파이프를 이용하여 물을 채우고 빼낼 수 있는 욕조를 사용했다.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은 오늘날의 것과 같이 유약을 바른 토기 파이프로 바뀌었다. 이 화장실에서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편리한대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배관을 통해 왕궁의 배설물을 밖으로 빼낼 수도 있었다. 이때 머리 위로 수조가 달린 화장실도 고안되었는데 이것은 전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수조는 빗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고 가물어 비가 충분히 오지 않을 경우에는 길어온 물을 부어 사용하였다.

화장실 기술의 발달은 고대 이집트인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까지 이집트 귀족의 집에는 더운 물과 찬 물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동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전신 목욕은 중요한 종교 의식의 한 가지였다. 그들은 육체의 정결함이 도덕적 순수함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했던 기원전 1000년경의 팔레스타인에는 복잡한 공공 수도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어느 장소에서 남자들이 '어디서 손을 씻죠?' 라고 묻거나 여자들이 '어디 분 바를 장소가 있을까요?' 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중일 것이다. 제법 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이 '실례 좀 해도 될까요?' 라고 어눌하게 말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배설 행위를 하고 싶다는 의사표시, 그리고 배설 행위를 하는 곳 즉, 화장실이라는 이름 그 자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완곡어법을 개발했다. 이러한 경향은 어제, 오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격식을 그다지 차리지 않았던―야만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만한―서양의 중세에도 성(城)과 수도원(修道院)에서도 '필요한 곳'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6세기에 살았던 에라스무스는 서양 최초의 예절교본이라 할 수 있을 그의 책을 통하여 화장실과 그곳에서 행하는 육체 행위에 대한 여러가지 규칙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는 '방뇨나 배변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실례이다' 라고 충고하고 있으며 방귀에 대해서도 '방귀가 나올 때는 기침을 하여 그 소음을 숨기라!'고 얘기하고 있다.

-로마의 화장실은 레저타운?

목욕이라는 행위를 사교적인 행사로 만든 최초의 사람들은 기원전 2세기경의 고대 로마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눈으로도 상당히 사치스럽게 보일 수 있는 거대한 공중 목욕탕 단지를 건설했다. 사치로운 생활을 즐기던 로마인들은 이 사교 목욕탕에 정원, 상점, 도서관, 운동실, 시(詩)를 읽기 위한 라운지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헬스클럽이나 스포츠 센터와 거의 유사한 형태이다.

카라칼라의 어떤 목욕탕은 로마인들에게 건강을 위한 활동과 미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해 주었다. 보대 오일을 바르고 때를 미는 곳, 열탕과 온탕, 냉탕, 사우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목욕탕뿐만 아니라 머리를 감고 향을 바르고 곱슬거리게 하는 곳, 운동실 등이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화장품들과 향수도 살 수 있었다.

운동과 목욕을 마친 후에 로마의 귀족들은 옆에 있는 도서관에 들러 독서를 즐기거나 강의실에서 예술과 철학(哲學)을 논할 수도 있었다. 화랑(畵廊)에서 갖가지 화려한 예술품들이 상시 전시되고 있었으며, 또 다른 방에서는 노예들이 쉴 새 없이 산해진미와 포도주를 날라 왔다. 오늘날로 치자면 거대한 유흥 타운인 셈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고급 사우나와 같은 유명 인사용이었다.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의 클럽이 오늘날의 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많은 멤버들이 이용했다는 것, 그리고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여자들의 것은 남자들의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변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여자를 위한 목욕 시설과 남자를 위한 목욕 시설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지만 나중에는 혼욕(混浴)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인들의 성적인 타락과 무관하지 않은데 천주교에서 국가적 정책을 시행하던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혼욕의 풍속은 지속되었다. 그후 1천 년이 지난 후 유럽에서는 다시 혼욕의 풍속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성문화의 타락은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태리어 '바지노(bagnio)'라는 말은 '목욕탕(bath)'과 '사창굴(brothel)' 두 가지를 모두 의미했다. 어쨌든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 로마의 이같이 사치스러운 사우나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로마의 유료 화장실

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장실 문화를 갖추었던 문명국이었다. 각 가정의 화장실은 물론 수세식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로마 시내에만 석조로 된 공중 화장실이 144개 이상이나 있었다고 한다.

번영 일로를 달리던 로마제국은 계속되는 사치로 인하여 결국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 인구 중 80% 이상이 국가의 부양을 받아 살아가는 인구였다. 위기감을 느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부족한 세원(稅源)을 보충하기 위하여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생각다 못한 황제는 로마 전역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모두 유료화시켰다. 이용을 하는 시민들은 이용료를 내야 했고 이용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벌금을 내야 했다. 배설을 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화장실 이용료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하나 있다.

어느날 황제의 아들이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냄새 나는 화장실 이용료를 세금으로 걷다니 황제답지 않은 처사이십니다."
베시파시아누스 황제는 화장실 세금으로 징수한 금화(金貨)를 아들의 코에 갖다 대며 말했다.
"이 금화에서 냄새가 난단 말이냐?"

-향수와 전염병

로마제국 멸망 이후 중세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목욕과 일반적인 청결함은 유럽인들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육체가 요구하는 모든 욕구를 가능한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몸을 다 드러내 놓아야 하는 전신 목욕은 유혹을 일으키는 못된 짓이라고 하여 금기(禁忌)시했다. 그러한 견해는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전 유럽에 급속히 퍼졌고 유럽 사람들은 침례를 받을 때 이외에는 거의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에서 심한 악취를 풍겼다. 서양의 향수 문화 발전은 이러한 당시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귀족들은 향수를 이용하여 몸에서 나는 악취를 감출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다.

유럽에서 목욕 문화가 사라지게 되면서 실내 화장실을 만드는 일도 곧 없어져 버렸다. 화장실 문화의 초기 단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뒷간, 야외변소, 요강이 사회의 전 계층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중세의 유럽은 '화장실의 복고풍 시대'였던 것이다. 유럽의 불결한 풍속에 기독교와 더불어 가세한 것은 잘못된 의학적 미신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시의 의학은 목욕을 하는 것을 건강에 좋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덕분에 수백 년 이상 거의 매해마다 전염병이 창궐했고 이때 유럽 인구의 10분의 1이상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에라스무스(용변을 볼 때의 예의)

1500년대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최악의 수준이었던 당시 유럽의 위생 관념에 더욱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육체의 유혹을 멀리한다는 점에서 과다한 경쟁을 벌였던 개신교와 가톨릭은 일생동안 피부와 물을 서로 닿게 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2천 년이나 전부터 발달해 있었던 화장실 배관기술은 왕실의 궁전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점점 뻔뻔스러워져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설물을 방출했다. 마침내 1589년 영국 왕실은 공개 경고문을 내다 걸어야 했다.

신분 고하와 시간에 상관없이 소변이나 기타 오물로 복도나 옷장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이 경고문을 봄으로써 1530년에 에라스무스가 그의 저서를 통해 남긴 충고-'방뇨나 배변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실례이다.'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에라스무스의 것보다 100년 뒤에 나온 다른 예절 교본 역시 이 심각한 사회 문제를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지저분한 풍속은 퍽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 확실하다.

당시의 프랑스 신문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공공 위생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파리는 오물의 천국이다. 거리는 구석구석 참을 수 없는 악취로 가득 차 있고 파리의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짐승보다 더한 악취를 풍긴다...

오랜 기간 사라져 있었던 간이 변기가 다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위생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한 악화일로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배관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은 가정에서 변기의 오물을 길에다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이 없는 베르사이유 궁전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에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완성되어 루이14세가 이 궁전으로 옮겨 살게된 것은 1682년의 일이었다.

루이 14세는 각 지방의 영주들을 불러 이 궁전 안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당시 이 궁전에는 약 천 명의 궁신들과 4천여 명의 궁신들이 살았다. 게란트(Roger-Henrl Guerrand)가 쓴 <화장실문화사(Les Lieux. Historie des Commdites)>를 보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궁전을 출입했던 수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상상하면 그저 아찔해질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이 비단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만 일어난 것은아니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르 가르니에의 오페라 하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관람객들은 몇 시간이건 변욕을 스스로 참아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용기를 지참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 14세가 그때까지 살던 파리의 루블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도 루블 궁전이 오물로 뒤덮여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외에는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 화장실이라고 불릴 만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으니 이들은 부득이 정원의 꽃이나 잔디를 밟고 용무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중 무도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를 지참하여 생리적인 응급 대비를 하기도 했으나 오물을 비우는 일은 하인들의 몫이었다.

이들이 오물을 버리는 곳 역시 으슥한 정원 구석이었고 궁에서 생활하는 궁신들의 배설 또한 이러했다고 하니 오물로 덮힌 궁전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 여성들은 커다란 모피 주머니에 휴대용 그릇을 넣고 다녔다. 그것은 지름 25센티미터 정도의 길쭉한 도기로서 손잡이가 달린 것이었는데 하이라이스 소스를 담는 그릇같이 생긴 것이였다.

-향기를 풍기는 국왕

루이 14세는 항상 몸의 어딘가에 변을 묻히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언제나 불쾌한 냄새를 풍겼는데 냄새를 숨기기 위해서 항상 향수를 휴대하고 다니며 쉴 새 없이 뿌려대야만 했다. 향기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이느냐가 문제겠지만 어쨌든 루이 14세는 '역사상 가장 향기를 풍기는 국왕'으로 칭하여졌다.

그러나 당시의 궁중에서 향기를 뿌리고 다니던 사람은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궁중에 여러 가지 일로 몰려든 신하들은 무엄하게도 아무 데서나-당시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다- 볼일을 보았으므로 궁중은 악취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았다. 참다 못한 루이 14세는 마침내 정원 안에 천 그루가 넘는 오렌지 나무를 심도록 명령했다.

심지어 축제 때가 되면 파리의 l분수대는 일제히 오렌지 쥬스를 뿜어 올렸는데 그것은 극에 다다른 당시 프랑스의 사치풍조를 반영(反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파리 거리를 뒤덮고 있던 악취를 없애고자 하는 방취(防臭)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의 돌팔이 주치의는 '치아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이상한 의학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건강한 이가 질병을 유발시킨다며 왕을 설득하여 성한 이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뽑아버렸다.

이빨을 잃은 루이 14세는 음식물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넘기기만 했으므로 만성 소화불량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고 매일 설사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기록에 의하면 루이 14세가 하루 동안 변기에 앉은 횟수가 줄잡아 15회 이상이었으며 종종 때를 놓쳐 바지를 더럽히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루이 14세는 항상 악취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고 신하들은 향수로 적신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왕과 정사를 의논했다.

-하이힐, 코오트, 모자

중세 유럽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야간용 변기(jerry, chamber pot:손잡이가 붙은 꽃병 모양의 변기)즉, 요강을 사용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요강 안에 밤새 담겨졌던 오수, 오물, 분뇨 등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내버려지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예사로운 습관이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거리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머리 위로 절대로 유쾌할 리 없는 오물 세례를 받을 때가 많았다. 이때 버리는 사람은 창문 밖을 향해 "물 조심하세요"하고 외치는 것이 고작의 예의였으며, 통행인은 "잠깐만!"하고 소리치며 어깨를 쭈그리고 뛰는 방법 외에는 위기를 모면할 도리가 없었다. 요행히 머리 위에 떨어지는 황금세례를 피할 수 있었던 날은 운이 좋은 날로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의 집들은 2층이 길목으로 돌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 안쪽은 2층 발코니의 처마 밑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길 안쪽을 다니면 오물을 뒤집어 쓸 염려가 적었고 길 바깥쪽은 오물을 뒤집어 쓸 위험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여기에서 여성을 에스코트할 때 남성이 건물 바깥쪽에서 서서 걷는 서양식 예절이 생겼다. 또한 남자들이 무언가를 머리에 쓰고 무언가를 겉에 걸치게 된 것도 모두 오물을 뒤집어쓰는 불의의 사고를 맞았을 때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17세기초 최초로 출현한 여성의 하이힐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오물 투성이의 거리를 걸을 때 드레스의 끝을 오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나무 등을 다듬어서 만든 신발을 신었는데 높이가 60센티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거리가 얼마나 많은 오물로 가득 차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거리를 뒤덮은 오물의 높이는 하이힐의 굽 높이와 정확하게 비례했다. 오늘날의 패션은 결국 오물을 피해가기 위한 유럽인들의 궁여지책(窮餘之策)에서 발전한 셈이다.

실내 야간용 변기는 분뇨의 처리나 청소 등에 있어서 그 사용이 매우 번거로웠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가옥 소유자에게 변소의 설치를 의무화시켰다. 또한 분뇨는 물론 어떤 물건이든지 창 밖으로 버려서는 안된다는 금령(禁令)을 14세기말부터 되풀이하여 공포했다.

18세기부터는 공동주택의 경우 두 개의 변소를 설치하는 것을 의무화하여 하나는 1층의 계단 가까운 곳에, 또 하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제일 위층에 설치하도록 했다.

이때 궁중에서는 비교적 이상적인 화장실이 개발되었다. 신하들은 왕의 침실 옆에 조그만 방을 만들고 그곳에 '혈공의자(穴公椅子)'라고 불리우는 뚜껑이 달린 변기를 설치하였다. 변기의 겉과 안은 왕의 것 답게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냄새를 지우기 위하여 왕은 많은 양의 향수를 몸에 뿌려야만 했다.

-수세식 변기

현대인의 생활에 있어서 이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어버린 수세식 변기는 4천년 전 미노아 왕족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래 전에 고안되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오랜 시간 동안 수세식 변기는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흔치 않은 수세식 변기의 흔적은 로마 시대 (BC 500∼AC 500)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변기 양식에는 대략 다음의 네 종류가 있었는데 두 가지 정도가 수세식을 채용한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1) 라사나(Lasana)
의자에 구멍을 내어 그 밑에 금이나 은으로 된 용기를 두었다.

2) 가스타라(Gastra)
흙으로 된 항아리 식. 오늘날의 수거식 변소와 유사한 것으로 공중 화장실에 사용되었다.

3) 크로아키나(Cloacina)
석조로된 수세식 변기, 공중용으로 사용되었다.

4) 라트리나(Latrina)
수세식 변기로서 개인 주택용으로 사용되었다.

-현대식 화장실

1847년 영국 정부는 런던에 대하수(大下水) 시설이 완성되자 런던의 시민들에게 모든 분뇨를 하수 시설에 방류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화장실 역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이루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그 해 전후에서부터 19세기말에 걸친 변기의 발명과 고안은 실로 눈부신 것이라 할 만하다. 이후에 발명되거나 개량된 변기들은 다음의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1) 수명식(受皿式, Pan Closet)
2) 변식(弁式, Valve Closet)
3) 봉전식(棒栓式, Plunger Closet)
4) 누두식(漏斗式, Hopper Closet)

초기의 수세식 변기 시설은 주로 연판제(鉛版制)로, 배관에 연관(鉛管)을 사용하였으므로 이를 설치하는 위생 공사를 연공사(鉛工事, plumbing)라고 하였다. 오늘날 이 공사에 연(鉛)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위생 공사를 프럼빙(plumbing)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배관 공사를 하는 배관공을 프럼버(plumber)라 부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기는 점차 도기제로 바뀌었고 제조 역시 도공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세기말부터 변기는 이미 냄새가 나지 않는 훌륭한 수세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실내에 설치하려는 많은 노력이 가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침실에 이동식 변기를 두는 오랜 습관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수세식 변기 자체를 침실에 설치 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침실이 너무 좁았던 까닭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가옥을 신축할 경우 침실 옆에 오늘날의 것과 유사한 독립된 화장실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욕조와 세면기 등 모든 위생기구를 함께 설치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것과 거의 흡사한 화장실 시설은 1852년 미국의 바논 산 위의 한 호텔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으니 오늘날과 같은 위생적인 화장실이 출현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벨기에의 오줌싸개 동상

벨기에의 브뤼셀에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희한한 동상이 하나 있다. 브뤼셀의 시내 한복판에서 발가벗은 사내아이가 고추를 내놓고 힘차게 소변을 누고 있는 동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고추 부분에 달린 노즐을 통해 물을 분출하게 만든 일종의 분수(噴水)와 같은 것이다. 오줌싸개 동상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전설을 많이 갖고 있다.

1) 옛날 벨기에에 침입한 프랑스 병사가 마을에 방화(放火)를 했을 때 그것을 보고 있던 어떤 소년이 오줌을 싸서 그 불을 끈 기념으로 세워졌다.

2) 전쟁에 패배할 전세에서 모두들 무릎을 맞대고 그 대책을 상의했으나 뾰족한 묘책(妙策)이 없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상자 속의 왕자가 오줌을 뿌렸던 것이다. 왕자의 천진한 얼굴을 보자 모두들 기분이 일전(一轉)되어 묘안(妙案)이 나와 전쟁에 이기게 되었고 그 기념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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